그러니까…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 오랜만에 큰 맘먹고 심야 영화를 보고 자정을 넘긴 시각에 나왔는데, 밤 10시 즈음에 카톡 하나가 와 있었다.
[형, 집이심?]
투둑- 답장을 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나라면 서너 시간 동안 답장이 없는 카톡은 금세 잊고 말았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을 깨고, 녀석은 오래지 않아 또 답장을 해왔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시간씩 간격을 두며 띄엄띄엄 이어졌다. 영화 이야기를 좀 하다가, 그 원작이었던 웹툰에 대한 이야기도 하다가, 은근슬쩍 날씨 이야기로 넘어갔다가… 뭐 그런 식이었다. 하긴, 사내놈들 사이에 카톡을 하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던 대화는 얼렁뚱땅 다음날 오후까지 이어졌다.
[형은 집??]
- [집 근처 카페]
[좋네 ㅋㅋㅋ 오늘 계속 그쪽에 있지?]
- [이따가 집에 가야지. 밤 되면 커플들이 넘쳐날 텐데 뭐하러 방황하겠냐]
[그럼 이따가 가볍게 한잔 어때?]
특별히 만날 사람이 없는 솔로에게 크리스마스이브는 다음날이 휴일인 하루일 뿐. 늘 하던 대로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글거리를 끄적이거나 게임을 좀 하다가 그렇게 술 약속이 생겼다.
'가볍게'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지만, 막상 만나면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는 내 역설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그 날의 술자리 역시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녁식사 겸 한 잔으로 시작한 자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2차로 이어졌고, 만 원에 4캔짜리 편의점 맥주를 두 번 사와 모두 비울 정도로 길어졌다.
대개 술이 들어가면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나는 특히 더 그렇다. 평소에도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한층 진지하고 까다로운 주제로 이야기하게 된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그만큼 말실수도 많아진다. 판단력을 흐리는 알코올의 영향 탓에, 그걸 통제해야 할 이성이 제자리를 벗어나는 까닭이다. 물론 어찌됐거나 그건 내 책임이지만.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십수 년을 거치며 말수를 줄이고 글수를 늘리게 된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글도 써놓고 수없이 고치긴 하지만, 그나마 글은 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여러 번 생각한 뒤에 쓰게 마련이니까.
글쎄…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하는 거지 뭐.
서로 생각하는 건 다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별 거 아닌 일도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일일 수 있는 거잖아.
오해가 생기거나 기분 상하는 상황이 되면 그냥 바로 이야기하고 넘기는 게 더 낫지 않아? 애써 괜찮은 척하고 뒤끝을 만드는 것보다는.
다음에 또 같은 주제로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도, 그걸 기억할지 못할지 장담할 수 없잖아. 그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는 그냥 그 자리에서 끝내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
이 이상 구체적으로 쓰지는 않으련다. 술자리에서 오간 일은 당장 며칠만 지나도 흐릿해지기 쉬운데, 몇 달 전 일을 지금 쓰려니 뚜렷하게 기억날 리 없다. 토막토막 떠오르는 것들이 있기에 그럭저럭 말이 되게 다듬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본래 의미에서 벗어나고 만다. 게다가 그날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개인적 가치관이라는 말로 포장하더라도 다소 민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도 하고.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해도 되는 사이. 그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뒤끝을 남기지 않는 사이.
술잔을 사이에 두고 내뱉은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수 없다. 그러니 그날의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끝내자. … 적어도 이 관계에서 이루어진 암묵적인 합의. 이 친구와 만나는 자리가 유독 편한 까닭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관계에도 예외없이 적용하고 싶을 정도.
게으름과 외로움이 공존하는 내 안의 패러독스는, 대부분의 관계에서 '내가 먼저 연락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누가 먼저 연락해오면 나가는 걸 귀찮아하지만, 막상 내가 외로움을 느끼면 적극적으로 움직이곤 한다. 몇 년 정도 그렇게 살다보니, 누군가 나에게 먼저 연락해오는 상황이 무척 낯설어졌다.
공통점이라곤 몇 안 되는 삶, 성격이나 가치관도 상당히 이질적인 사이. 요즘 같은 세상에 세 살 차이면 '비슷한 세대'라는 말이 100% 적용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친구와 나는 이야기가 통하는 지점을 꽤 많이 가지고 있다. 요즘 부쩍 자주 연락하게 되는 이 녀석이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를 대강 나열해보니 이 정도다. … 그저 익숙하지 않을 뿐, 요즘의 내가 오는 연락을 칼같이 쳐낼만큼 과하게 게으르지는 않다는 걸 확인하게 해준 것도 이 친구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오늘에야 다시 생각하게 된 이 흐릿한 기억도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다. 살면서 만들어온 많은 기억들처럼 까맣게 잊혀질지, 아니면 자그마한 조각 하나라도 남겨둔 채 어느날 불현듯 다시 떠오를지.
단지 그 시간이, 그 관계가, 그 사람이 나에게 머물다 간 적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이 경험과 이 생각은, 앞으로 나라는 인간이 변해갈 모습에 분명 영향을 미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