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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30. 2015
어떤 사랑Talk #2. '처음' 만난 그때
미리 밝혀두지만,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2004년 1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생애 처음으로 상복을 입게 됐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 전까지 너무 순탄하게만 살아온 탓일까.
내 곁의 누군가가 떠나간다는 사실이 크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5일에 걸친 장례식 동안 입관식 때 무너진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를 제외하면, 나는 담담했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비였던가 눈이었던가.
아무튼 하늘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축축한 것을 흠뻑 맞으며 발인을 봤다.
장손이었던 형이 영정 사진을 든 채 앞장섰고, 나와 사촌형제들이 뒤를 따랐다.
그 날 참......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봤다.
그렇지만 그 순간까지도, 나는 담담했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사필귀정(事必歸正).
그릇된 일은 결국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법이다.
사진 속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쌓여있던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남아있다는 그 사실이 비로소 온몸으로 느껴졌다.
수 년의 투병생활부터 장례식, 한 삽 한 삽 관 위를 덮어가던 흙까지.
모든 장면들이 스쳐가면서 엎드려있던 감정은 그렇게 갑자기 터져나왔다.
하나둘, 어딘가에 나도 모르게 박혀 있던 기억들이 쉴 새 없이 오버랩됐다.
미처 소화할 여유도 없이 울컥울컥 밀려오던 감정의 파도.
방파제는...... 너무 쉽게 무너져버렸다.
사는 게 별 흥미가 없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도록 공부 같은 걸 해서 뭐에 쓰지?
이런 게 사는 데 과연 무슨 도움이 되는 걸까?
온갖 비관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갔고,
덩달아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때부터 공부는 그냥 기계적으로 관심 있는 과목만 팠다.
유달리 싫어했던 수학 점수는 한 자리 수를 찍기도 했을 정도.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생 난리를 치기까지 했지만,
(다행히)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의 만류로 미수에 그쳤다.
그 즈음이었다.
'그 아이'를 만난 건.
거의 모든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
여유가 있을 때면 방구석에 틀어박혀 우울한 글이나 끄적이곤 했다.
방황은 했지만 반항할 배짱은 없었기에 선택한 나름대로의 소심한 저항.
시(詩)를 쓰겠다며 적은 노트엔 죄다 '공허' '허무' '눈물' '슬픔' '아픔' 같은 단어들로 가득했다.
누구를 향한 건지도 모를 어두컴컴한 표현들은 대개 이때 섭렵했을 것이다.
뭐, 덕분에 지금도 곧잘 써먹을 때가 있지만.
어느 날,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녀석이 나를 불러냈다.
귀찮아서 어지간한 연락에도 응하지 않던 내가 그 날 나갔던 건, 오늘 이렇게 되려고 그랬던 건가 싶다.
어떤 사람은 처음 만나던 순간 하나하나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안 되더라.
아무튼,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의 시작점은 그랬다.
초등학교 동창.
그 아이와 난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낯선 표현이다.
내 기억에 초등학교 시절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탓.
몇몇 이름을 기억하는 친구들이 있고,
인상 깊었던 사건들도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냥 그 정도 뿐.
당시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모났고, 훠얼씬 까칠했으며, 낯가림도 굉장히 심했다.
그 아이가 그러더라.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말을 걸면, 늘 화가 나 있는 것처럼 툭툭 쏘곤 했었다"
고.
아...... 이불킥.
술도 못 마시던 나이.
지금처럼 카페가 보편적이지도 않던 시절.
그 아이와 난 대체 어디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던 걸까.
또, 할 이야기는 무엇이 그리 많았던 걸까.
(자리를 만들어준 녀석은 이미 Out of 안중......)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노래방에 갔던 것,
어둑어둑해진 시간이 돼서야 함께 집으로 향했던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 아이와 난 같은 동네에 살았다.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아이는 1가, 나는 2가.
같이 걸어오는 동안 나눴던 이야기가 뭐였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데......
거 참 씁쓸한 일이다.
한 가지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건,
그때부터 내가 틈만 나면 오밤중에 뛰쳐나가는 '스쿨버스 망부석'을 시작했다는 것.
밤 10시에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나면 자전거를 타고 부리나케 달렸다.
학교에서 닳을대로 닳았던 체력도 그 시간만 되면 어찌나 팔팔하게 샘솟았던지......
스쿨버스가 서는 정류장에서 11시가 넘도록 기다리다가 '벌써 지나갔다보다' 싶어 터덜터덜 돌아오는 날도 부지기수였고, 간발의 차이로 멀어져가는 스쿨버스를 발견하고는 그 아이가 갔음직한 길을 따라 페달을 밟았던 날도 꽤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건대, 그렇게 무작정 따라가다가 그 아이를 만난 날도 있었던 듯 싶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시절이지만, 제대로 눈에 담아 바라보기 시작했던 건 그때였다.
그렇기에 난 그 날을 '처음'이라 말한다.
그때부터 분명, 난 그 아이에게 빠져있었다.
한없이 어둡기만 했던 하루 중,
그 아이를 만나던 짧은 시간 만큼은 달랐으니까.
꽤 오랫동안 스스로를 의심해왔지만,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건 분명 '사랑'이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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