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들과 연필, 인공눈물을 필통에 넣어 가방에 넣고 또 무얼 넣어야 하나 고민하다 물을 담은 텀블러, 새 노트 두 권, 읽던 책 한 권, 지갑을 넣어 가방 싸는 걸 마쳤다. 평소 외출할 때 싸는 짐과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고심하게 되는 이른 밤, 가방 싸기.
마지막으로 가방을 싸면서 고심했던 게 언제였던가. 대학교를 들어갈 때였던가. 그때가 언제인지 이제는 전생 같기만 한 머나먼 시간이건만 전생까지는 아니지만 출근이라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십 년 동안 멀어졌던 단어가 당장 내일로 닥쳐오니 가방 앞에 선 나는 대학교 신입생인 마냥 무력해졌다.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우연히 봤던 채용공고가 떠올랐던 아이와 여행을 떠나기 전날의 늦은 밤, 정말 내가 출근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나 자신에게 노력하는 액션이라도 보여주자 싶은 마음으로 보냈던 이력서에 연락이 왔고, 2차에 걸친 면접을 보고, 어느새 첫 출근을 앞둔 채 가방을 싸고 있는 거였다.
올 하반기에는 무언가를 본격적인 걸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든, 본격적인 창업 준비를 하든, 본격적인 취업을 하든, 본격적인 글을 쓰든 무언가, 그게 무언지 모르겠으나 그 무언가를. 막연한 다짐 속에 이뤄졌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 왜, 나를? 오랜만에 면접이라는 걸 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는데, 진짜 오래간만에 긴장되는 짜릿한 경험이었는데 거기에서 끝나면 나름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첫 출근 날,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빼곡한 사무실에 들어서 "안녕하세요." 말하고 안내받은 내 자리 앞에 섰다. 내 자리, 내 컴퓨터.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뭐 나를 갉아먹으려 들면 내가 잡아먹어주면 되지, 굳이 되짚지 않아도 될 평소 마인드로 내 자리, 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 자리, 내 컴퓨터. 아이와의 여름 여행을 위해 사두었던 가방은 출근용 가방이 되어 내 자리, 내 컴퓨터 아래 놓였다.
내 컴퓨터라는 컴퓨터를 켜놓고 가방에서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 책상과 서랍에 세팅하고 포맷해 놓은 컴퓨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아직 실감 나지 않는 내 책상과 내 자리를 음미하면서 첫 출근 파이팅이라고 보내주는 지인들에게 여유롭게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주변에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까지만.
그 이후로 계속 그런 여유로운 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이틀 이곳에 내 자리가 있다는 걸 조금씩 실감해 나가기 시작한다. 관련된 사람들에게 전화로 인사를 돌리면서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호칭으로 스스로를 부르면서 내가 처음엔 이랬었지 하면서 뒤돌아보게 될 나중을 미리 생각해 본다. 그런 위안을 하며 출근 삼일 만에 녹초가 되어 깨어나 주말이 언제 오나 기다린다. 고작 삼일 차에 내가 직장인이 되었구나 싶어지는 순간이다.
삼일 차에 쓰던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벌써 출근 삼 주가 되어가는 시점이다. 그 사이 가방으로 내 치약과 칫솔, 개인 컵, 점심에 먹어야 하는 약 등이 사무실 내 책상으로 배달되었다. 책상 위에 내 물품이 추가될수록 그래, 진짜 내가 일을 시작했구나 싶어 진다. 혹시 몰라 챙겨 왔던 회사 서류는 점점 자연스레 회사에 두고 온다. 집에선 일하지 않겠단 다짐이 그새 강해진다. 그래, 이게 직장인이지.
지인이 오늘 회사에 적응 좀 했냐고 물어봤다. 내일 출근인데 술 마시는 걸 보니 그런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출근 삼 주 만에 적응 완료.
사진: Unsplash의Christopher G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