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매]
‘이렇게 하자!’ 하고 결심했을 때, 실제 그것을 하는 것에 대해 묘한 쾌감이 있다. ‘이렇게 하지 말자!’라고 결심했을 때 실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쾌감도 있다. 나는 그것을 긍지라 부른다. 정확히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했을 때, 또는 하지 않고자 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때, 그때 마다 나는 어떤 전체의 작은 조각을 하나 얻는다. 그런 조각이 수백, 수천, 수만 개가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조각은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의 전체로 완성된다. 그 이름이 긍지다.
내게 긍지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하지 않고자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매순간 그러는 내게,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온 내게 찍어주는 확인 도장 같은 것이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지 않을지는 인간의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인간성 조건인 시비, 공감, 이성에 의해 큰 틀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 인간의 개별성 조건인 시비, 가부, 호불호에 따라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정한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서든 하면 안 돼. 인간으로 살고자 하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이것은 되도록 그래야 해. 간혹 아주 특정한 상황에서만 예외를 둘 수 있지, 평범한 일상 중에서는 그래야 하는 거야. 이것은 옳아. 바른 행동이야. 저것은 옳지 않아. 이러면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끼치게 돼.’ 이렇게 큰 틀은 인간성 조건과 개별성 조건에 중복되는 시비에서부터 개인적, 사회적, 주관적, 객관적 공통분모를 따르며 시작한다. 그 후, ‘난 이것이 좋아. 혹은 싫어. 저 행동은 멋지네, 나도 따라 하자. 저건 정말 별로다. 나는 절대 저러지 말자. 나는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이 부분은 내 성향과 맞지 않으니 되도록 하지 않을래.’라는 인간의 개별적 조건에 따라 자신의 세세한 가치관을 다듬어 간다.
정리하면,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사고하는가?’ 그렇다.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가?’ 역시 그렇다. ‘사회에 속한 나는 큰 틀에서 남과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이마저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의 인간성 조건을 충족했으니 스스로를 인간으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이미 인간인 나는 어떤 인간인가? 무엇이 나를 나이도록, 남과 같지 않은 나만의 독특함을 부여하는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옳고 그름의 영향에서 벗어나 나는 무엇이 되고 무엇이 되지 않는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파악했나?’ 이도 그렇다. ‘외부 상황, 환경, 입력 없이 본래의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나?’ 이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나만의 옳고 그름인 시비, 되고 안 되고인 가부, 좋고 싫음인 호불호를 모두 가졌으니 나는 인간의 개별성 조건도 충족했다. 그럼 나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나’인, 온전한 성인이 된다. 스스로를 성인으로 만들 수 있으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계관이 만들어진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관을 쌓아올릴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토지는 기둥 세 개에 의해 떠받들어지고 있다. 시비, 가부, 호불호라는 철근에 공감과 이성이라는 콘크리트를 꼼꼼히 발랐을 수록 기둥은 견고해지고 그 위에 얹힌 세계도 안정된다. 그간 세계관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내가 걸어온 발자국은 전부 길이 되고, 길은 곧 가치관과 신념이 된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으면 나는 이미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숨 쉬듯 태연하게 알고 있다. 긍지의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긍지의 조각을 수집하는 일은, 아직 평평하기만 한 땅에 나만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건물을 올리기 위해 벽돌을 모으는 일과 같다. 바지런히 모은다면 20대가 지나기 전에 나는 완성된 긍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안주머니에 따듯하게 빛나는 긍지를 넣어두고, 자신의 나라가 한 건물씩, 한 마을씩, 한 도시씩 완성되는 모습을 종종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긍지를 가지고 있으면 곧 스스로를 긍지 있게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나는 그 마음을 '자긍심'이라 부른다. 자긍심은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가지지만, 무엇보다 자긍심이 불러오는 두 가지 마음 덕에 더욱 중요해진다. 첫째는 긍지 있게 살아온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존귀하는 여기는 마음, '자존감'이다. 자존감을 가진 나는 잘못한 일에도, 잘한 일에도 자신을 말끔하게 질책하거나 칭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지금껏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하지 말자 하는 일은 안 하며 살았어. 다만 나도 아직 부족한 인간이니 실수할 수도 있어. 괜찮아. 어쩌다 그런 거야. 스스로 반성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줬으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리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돼.’ 이렇게 자신의 잘못, 실수, 단점, 약점에 대해 심하게 질책하지 않는다. 과하게 자책하지도 않는다. 지금껏 잘 해왔으니까.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건 잘했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잘했어. 앞으로도 잘하자.’ 자신의 성공, 장점, 강점에 대해서도 말끔하게 칭찬할 수 있다. 으스대지 않아도 되고, 뻐길 이유도 없다. 과하게 확대해석할 것도 없고, 왜인지 몰라 불안하게 기뻐할 필요도 없다. 남과 비교하며 우월감에 젖을 것도 없고, 고작 가진 것이 이것뿐인 양 옹졸하게 유난 떨 것도 없다. 익히 있었던 일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스스로를 충분히 존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신을 과하게 책망하지 않는 마음’과 ‘자신을 깔끔하게 칭찬할 수 있는 마음’은 곧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말끔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된다. 나는 그 마음을 ‘자기애’라고 부른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견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긍지 있는 삶을 살면서 스스로를 존중하고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여기까지 왔다면 나는 이제야 타인을 오롯이 사랑할 준비가 끝난다. 세계관으로 만든 긍지, 그 자긍심에서 태어난 자존감과 자기애를 가지고 있어야만 나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상대에게 무엇을 얻어낼 마음이 아니다. 의존하거나 구속할 마음도 아니다. 남과 비교해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내 부족함을 상대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아니다. 내 감정을 온통 쏟아 부을 대상도 아니고, 낮은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대상도 아니고, 쉽게 부려먹을 대상도 아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듯 너를 너로서 존중하고, 내가 스스로를 긍지 있게 여기듯 너는 너대로 긍지 있다 대우하면서, 내가 나를 사랑하듯 너를 사랑하는 일. 상대를 그리 인지하고, 여기고, 대할 수 있으면 나는 그제야 너에게 이 말을 할 수 있겠다. 어느 유명한 영화의 유명한 대사처럼, ‘이제야 네가 보인다’고. 나는 지금 너를 오롯이 보고 있고, 이 세상에서 유일한 너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25. 02. 08.
<참고>
https://brunch.co.kr/@e-lain/65
https://brunch.co.kr/@e-lain/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