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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당한 세계의 결말 2

: 한 살, 열다섯, 스물여섯 [21매]

by 이한얼






-2부- 열다섯


“할머니는 나를 왜 사랑해요?”


올림픽대로를 달리던 차에서 뒷자리의 손자가 나란히 앉은 할머니에게 한 질문이었다. 손자는 사실 뭘 알고 물은 것이 아니다. 저 질문이 나오기까지 오랜 고찰을 거치지도 않았고, 어떤 거리낌에서 비어져 나온 결론도 아니었다. 단지 정체는 모르지만 왠지 어떤 답을 듣고 싶은, 아주 작은 마음의 단차가 만들어낸 사소한 질문이었다. 그러니 묻는 순간에도 그리 심각하지 않게, 문득 떠올라서 대뜸 물었을 뿐이다. 손자의 질문을 들은 할머니의 표정을 손자는 기억한다. ‘이게 무슨 질문이지?’라는 벙찐 표정.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잠시 혼란스러운 눈빛. 그러다 할머니는 생각을 길게 잇지 않고 금세 답을 했다. 다음과 같이.


“왜긴, 네가 내 손자니까 그렇지.”


어디 하나 이상한 구석이 없는 내용. 뭐 하나 잘못된 것 없이 응당한 연유. 너무나 당연한 답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왜 사랑하겠는가. 처음은 자식의 자식이니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이 뻗쳐 그 아이에게까지 가 닿았겠지. 그러다 자식의 자식이 자라나는 모습은 켜켜이 살펴보고 혹은 직접 키우면서 마치 또 다른 자식처럼 손자마저 내리사랑하게 되었겠지. 손자의 난데없는 질문에 할머니의 대답으로서는 이미 충분한 내용이자 의미였다. 다만, 문제는 이 손자다. 태생적인지 환경적인지 어느 순간 세계를 키워가는 <발화점>이 너무 높아진 귀찮은 꼬마.


손자는 할머니의 백점만점에 95점짜리 대답을 듣고 순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날 저녁에 먹은 음식이 무슨 맛인지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운전석에서 운전을 하며 그 문답을 들었을 아버지도, 조수석에 앉아 함께 들은 어머니도, 곁에서 꼬물거리는 어린 동생은 물론 그 손자를 보며 직접 답을 한 할머니마저도 그 손자가 그리 충격 받았으리라고는 꿈에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럴 만한 일이 전혀 아닌데.


당시 그 손자는 할머니와의 문답 이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단지 ‘내가 손자여서’라고? 그럼 내가 손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겠네. 이상하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지만 내 할머니여서 사랑하는 것은 아닌데. 아닌가? 할머니가 내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도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할머니를 사랑할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서 나도 사랑하는 걸까? 그러면 할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이제부터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하면 나도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게 될까?


네, 한 마디로 헛소리다. 이제와 보면 인간 사이의 연은 그렇지 않다. 함께 쌓아온 역사 또한 그런 식으로 단락적인 조건부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나를 왜 사랑해요’라는 질문에 ‘내 손자니까 그렇지’라는 답은 인과가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작용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짜맞춘 구색에 더 가깝다. 설령 그 손자에게 친할머니가 아니었다 한들, 그만큼 가까이 살고 키웠다면 손자가 아니었어도 결국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부터 갑자기 할머니와 손주 관계가 아니게 된다고 해도 지금까지 쌓아온 사랑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일은 뭐랄까, 누구도 잘못한 것이 없다. 다만 자라며 세계관을 키우는 아이가 입력되는 정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지 못한, 일종의 기간이 정해진 부작용이다. 서로 다른 개념과 관계를 가진 복합적인 표현을 한 가지 방식으로 이해하려 했으니 중간에 끼인 듯 추상적 생각과 구체적 말 사이에서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다. 기간제 부작용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든 저렇게든 해결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당시 그 손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필 발화점이 너무 높은 상태에서.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함께 있던 누구도 그 아이가 충격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고. 그리고 어떻게 꼬였는지 파악하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실행하는 성향을 가진 어른은 그 차 안에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교육 방식마다 다를 뿐 정답이 없는 일이고, 또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적은 시대이기도 했다.


그 손자는 이후 오랫동안, 정말 닳고 스러질 만큼 오래도록 할머니와 나눈 그 두 줄짜리 문답을 쓰다듬고 곱씹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껏 너무 당연해서 태연하게 살아온 이 ‘응당한 세상’이 더는 응당하지 않다는 신호와도 같았다. 나는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긍정받는 것이 아니야. 이 세계의 모든 행위는 전부 근거와 이유가 있어. 이 세상은 존재함만으로, 관계를 떠난 그 영혼 자체로 누군가의 기쁨이 되거나 사랑이 될 수 없어. 그 사실을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장 가깝게 지냈고 가장 많이 사랑하던 이들 중 한 명이 직접 인준해줬어. 그러니 내가 누군가에게 긍정받으려면 무엇인가를 지불해야 해. 나도 사랑을 주든, 뭔가 노력을 하든, 아니면 어떤 관계나 인맥 안에 속해 있기라도 해야 해.


그렇게 ‘지금껏 응당하다 여겨왔던 세계는 사실 응당하지 않아’라고, 열다섯의 소년은 처음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스스로 개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 손자는 한국 나이로는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이후 1년이 지나기 전에 첫사랑을 만나 첫 연애를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나기 전에 개변 중인 불완전한 세계가 개벽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게 됐다. 그렇게 1시대에 덜렁 떨어진 손자에게 사랑은 뭐랄까, 보다 같은 교환비를 가진 교류 체계에 근접해간다. 사랑하는 할머니는 내가 손자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거야. 그 관계가 아니라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어. 사랑하는 연인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니까 나를 사랑하는 거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이렇게 헤어졌듯이 나는 사랑받지 못해.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야. 하는 말을 따르지 않으면 지금처럼 나가라고 쫓아낼 거야. 그러니 사랑받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해야 돼. 한겨울의 찬바람을 피해 어느 건물의 차가운 계단에 앉아 밤을 지새우면서 당시 손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가족과 연인마저 그러니 친구나 지인은 당연하겠지. 다들 이득이 있으니 나를 사랑하는 거야. 관계에 속해 있거나, 얻을 것이 있거나, 고분고분하니까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니 이 세계에서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받고 싶은 만큼 나는 계속 뭔가를 내어놔야 해. 그 흐름이 끊기면 홀로 떨어져 나가는 거야. 이 세계는 그것이 ‘응당함’이야. 그래, 그렇지. 근데… 그렇게 해서 사랑받으면 나는 행복할까? 이 모든 것을 겪고 느끼고 깨닫은 후에도 이제와 이전 그 응당하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 이 슬픔과 괴로움이 모두 사라질까? 그렇게까지 해서 나는 남에게 사랑받아야 하는가? 그래야만 살 수 있는가?


올림픽대로를 달리던 중에 있었던 아주 작은 문답에서 시작되어 세계 개변과 첫사랑, 강제적 개벽과 가출을 거치며 그 손자는 점점 ‘응당함’이 무엇인지, 그 응당함이 어디까지 정당한지, 그 정당한 응당함을 얼마만큼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좋아,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사랑은 교환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응당하다고 일단 쳐보자. 그러면 그것을 반증할 수는 없는지 확인해보자. 관계에 속했기에, 받는 것이 있기에, 말을 잘 듣기에 사랑할 수 있다는 이 세계에서 관계와 상관없이, 받는 것이 거의 없어도, 말을 듣지 않아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지 내재비평 해보자. 그러는 이가 있는지 찾아보고, 찾지 못했다면 내가 그럴 수 있는지 해보자. 아주 최초의 작은 우연, 그 우연이 만들어낸 작은 만남, 그 만남으로 알게 된 특정 몇몇의 누군가, 그 누군가를 일단 정해보자. 그래서 그들 중 하나가 나와 관계했다가 떠나도 사랑해보자. 그들 중 다른 하나내게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되어도 사랑해보자. 그들 중 또다른 하나가 내내 내 말을 듣지 않아도 쫓아내지 않고 사랑해보자. 평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10년쯤, 어떤 관계도 이득도 없어도 내가 상대를 사랑할 수 있으면 나는 최초의 산타클로스가 되는 거야.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것뿐이 되는 거야. 내 주변인이 하필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 되고, 그러니 내가 그런 사람이 됨으로써 지금 이 응당한 세상을 이전 응당한 세계로 내가 원하는 방식을 통해 되돌릴 수 있을 거야. 그럼 해보자.


…라고, 당시 왜인지 모르고 했던 일을 대해 그 손자는 많은 시간이 지나 그렇게 반추하고 해석했다고 한다. 그 '관계와 교환을 벗어난 사랑의 과정'은 일종의 자기증명이라고 했다. 세상과 주변인이 아니라고 하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결과를 보이며 부정할지 가래는 과정이었다고. 다만 그 결과에 대해서 당시는 알 수 없었다고 했다. 후일담이지만 그 10년을 고작 몇 개월 남기고 다시 개벽을 거쳐 두 번째 시대가 새로 열렸기 때문에. 정확히는 그러는 중에 거의 모든 인연이 백지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산타클로스가 되지는 못했다. 거의 근접했다고는 여기지만, 아직 스스로 명쾌하게 증명하지는 못했다고 여기고 있다. 내가 봤을 때는 아닌데. 사실 내 생각에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시도하는 즉시, 그 ‘응당함’을 증명한 셈이다. 이 세상은 하나의 응당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의 세상에서 그만의 ‘응당함’을 찾으면 족한 일이다. 다만 그 손자는 욕심이 많아서, 또는 당시 생각이 조금 부족해서 보편적인 ‘응당함’을 찾으려고 안 해도 되는 고생길에 올랐다. 헛수고냐고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그 과정이 그가 결국 찾아낼 본인만의 응당함을 더욱 견고하고 찬란하게 만들 테니. 다만 그러는 와중에 ‘이미 결론지었어야 하는 관계’와 계속 부대껴야 할 테니 다른 이가 아닌 본인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힐 뿐이다.






25.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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