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발 좀! ㅋㅋㅋㅋ [24매]
10시쯤 가족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알겠다고, 다만 지금 작업 중이니 언제쯤 오는지 알려달라고 말했다. 어딘가 들렸다 갈 예정인데, 얼마나 걸릴지 속단할 수 없다더라. 그 역시 알겠다고, 그러면 출발하기 전에 연락만 달라고 말했다. 본가에서 오든, 들린 장소에서 오든, 여기까지 최소 20분 이상은 걸리니까. 가족은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두 시간쯤 지났다. 전화가 울리기에 이제 출발했나 보다 여기며 전화를 받았다. 마침 작업도 거의 끝낸 참이니 잘됐다. 근데 갑자기 15분 후에 도착한다고 하시더라. 출발은 아까 했다고.
아 제발 좀! 매번 이런 식이다. 하나하나 새보지는 않았으나 이런 일이 백 번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에 내가 설명한 것만 수십 번, 짜증낸 것도 수십 번, 화를 낸 것도 수십 번이다. 이제는 화조차 나지 않아서 그냥 알았다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부랴부랴 씻으러 들어갔다. 드라이기는 만져보지도 못한 채 푹 젖은 머리로 집 앞 길가로 나왔다. 아까 도착한다는 시간이 벌써 됐으니까. 근데 차가 안 보인다. 잠시 기다리다가 이상해서 전화를 해보니 오는 도중에 기름을 넣고 다시 출발했다고 한다. 거의 다 왔다고. 26도의 뙤약볕이 젖은 머릿결 사이로 아름아름 스며들었다.
아이고. ㅋㅋㅋㅋ 우리 가족은 보통 사람들이다. 어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정확히 반반으로 나뉜 극보통 사람들은 아니다. 내가 봤을 때 자잘하고 옅은 단점을 많이 가진 대신, 누구보다 눈부신 장점 하나씩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자잘하고 여럿인 단점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상대가 덜 불편할까, 내 행동을 이렇게 바꾸면 상대를 더 배려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오늘 일만 봐도 그렇다. 첫째, 오는 도중이 아니라 출발했을 때 연락을 주면 부랴부랴 씻고 나올 필요가 없다. 물론, 미리 씻어도 된다. 애당초 점심을 같이 먹자는 전화는 두 시간 전에 왔으니 그때 바로 씻어도 된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 역시 그렇게 하니까. 다만 애석하게도 나는 뭔가를 할 때 기세를 이어나가는 것이 아주 중요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하핫! 지금 두 줄 쓰고, 씻고 나와서 다시 다섯 줄 써야지!’가 가능한 천재 글쟁이도 아니다. 쓰던 글은 되도록 그 자리에서 마저 써야 하고, 생각이 떠오른 순간 최대한 휘발되기 전에 활자로 남겨놔야 한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이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출발할 때, 내비를 찍어 도착 예정 시간이 딱하고 나오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서 몇 시쯤 도착한다고 연락만 주면 된다. 그러면 ‘이 이상은 욕심이지’라며 털고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오는 시간 동안 급하게 않게 씻고 나오면 되니까. 앞서 말했듯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한 욕심도 아니고. 나는 하던 일은 도중에 끊고 미리 준비해놓는 것보다 언제 도착할지 정확히 안 상태로 준비하는 것이 더 편한 사람이다. 만약 상황과 입장이 반대였으면 나 역시 응당 그렇게 했을 테고. '야, 글 쓰다 중간에 끊고 왜 미리 씻으러 가? 그냥 내가 출발할 때 연락할게. 그러면 그때부터 씻어도 시간 충분하지 않아?'라고. 이게 왜 어렵지? 충분히 요구하고 배려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리고 둘째, 방금 통화 중에 왜 이렇게 촉박하게 알려주냐는 말을 들었다면, 오는 도중 싼 가격을 발견하고 다따가 주유소에 들어가게 됐을 때 기름을 넣고 가니 예정보다 5분이나 10분쯤 늦게 도착한다고 알려주면 된다. 그러면 머리도 못 말리고 급하게 나올 필요도 없다. 마음이 급해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신경이 곤두선 채로 거실 이곳저곳을 쏘아볼 이유도 없다. 결국 두 번의 연락이 제때 없어서 나는 느긋하게 일어나 평온하게 오전 일정을 보내다가 갑자기 다급해져야 했다. 부랴부랴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채 길가로 나왔으며, 미리 알았다면 머리를 말렸을 법한 시간에 땡볕 아래서 한동안 차를 기다려야 했다.
가족의 변도 이해는 간다. ‘아니야, 조급해하지 마. 우리가 그냥 집 아래에 차 세워두고 기다리면 돼. 그러니 급할 필요 없이 천천히 하고 나와.’ 기본적으로 이런 식이다. 그 역시 말이 된다. 근데 나는 아니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세워두고 앉혀두며 기다리게 하는 것이 싫다. 좁고 굽은 골목길로 굳이 큰 차가 들어올 필요도 없이, 시간을 맞춰서 큰길가에서 기다리다가 바로 차에 타서 점심을 먹으러 가고 싶다. 아래에서 기다린 시간이 길어질수록, 허기진 채로 도착한 식당에서 급하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는 일도 불편하다.
물론, 사람은 각자 다르다. 생각도, 방식도 전부 같을 수 없다. 다름은 당연한 것이지, 틀림이 아니니까. 내 입장에서는 내가 맞고, 가족 입장에서는 가족의 생각이 옳다. 그렇기에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합의를 하며 맞춰감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다를 수 있지.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향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말을 한다. 짜증내며 우선 서운해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화부터 내지 않고, 어떻게 다른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심지어 십 수 번 반복해서 한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의 단점 중 하나는 아까 말했듯, 상상력이 부족하다. ‘너는 그렇구나’는 바로 인지하고 이해한다. 상상력이 부족한 거지 인지력이 부족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너는 그렇구나’에서 ‘그러면 이쯤에서 맞추자’가 아니라, ‘그래서 뭐?’로 연결된다. ‘네가 그렇다는 건 자알~ 알겠어. 다만 내가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온 내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걸!’로 귀결된다. 아니 왜 도대체 저기서 무조건 거기로 갈까? 그것을 15년 이상 오래 고민하고 궁리해본 결과, 결론은 단순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라고. 나와 가족 사이에서 오랫동안 벌어진 크고 작은 갈등은 전부 다른 열매를 맺고 있지만, 그 가지와 줄기를 따라 뿌리까지 가보면 결국 저 결론에 도달한다. 앞서 말했듯 인지력은 부족하지 않다. 아버지는 내가 본 모든 사람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똑똑하고 총명하신 분이니까. 우리 가족 모두는 지금까지도 중요한 길목에서 아버지의 판단을 가장 신뢰한다. 그렇다고 인내심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어머니는 내가 본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참을성이 강하신 분이니까. 사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빠지면 정서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뭐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속이 좁은 것도 아니다. 동생은 최소한 나보다는 훨씬 무던한 거물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며 감정이 크게 너울지지 않는 성격이다. 동생이 없었다면, 정확히는 나머지 세 명이 각자 무기력증과 피해의식과 노이로제를 가지고 서로에게 난동을 부리고 있을 때 동생만 유일하게 그 시기와 상황을 무던하게 넘기는 일로 균형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아마 11년 전 그날, 우리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네 명 모두 살아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고, 남은 사람들도 1년에 한 번쯤 얼굴이나 겨우 보며 살았겠지. 물론 총명함과 인내심과 무던함만으로 유지하게 힘든 가정에서 마지막으로 부족한 이해심은 내가 채웠고. 그렇게 단점이 수두룩하게 많지만 각자 빛나는 장점 하나씩을 가진 네 명이 40년째 우리만의 <싸리나무 담장>을 무너트리지 않고 지켜낸 결과가 현재 모습이다. 과정이 곧 결과가 되는 전리품인 셈이다.
그러니 자꾸 반복되는 이 일에 관련된 단점은 상상력 하나다. 상대 입장, 안 해본 경험, 다른 생각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할 뿐이다. 극도로 부족한 상상력을 각자의 총명함과 인내성과 무던함으로 보충한 덕에 겉으로 봤을 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뿐이다. 게다가 가족들끼리도 큰 문제가 없다. 서로 상상하지 않으니 서로 억울할 것도 없다. 다만 그런 사람 셋 사이에 상상력이 과하게 많은 내가 끼어버린 것이 문제지. 근데, 이 역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함을 넘어 응당함이기도 하다. 내가 상상력이 없었으면 내 장점인 이해심도 없었겠지. 그러면 가정을 지탱하던 네 기둥 중 하나가 없다는 뜻이고, 그러면 우리는 진작에 남으로 살았을 테니.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상상력 부족>이 그들이 단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다. 반대로, <상상력 과다>가 '이해심이라는 장점'이 가진 그림자라고 봐야 한다. 가족 중 나만 가진 장점이 이해심인데, 상상력이 있어야 이해심도 발휘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각자 유일한 장점을 가진 가정 내에서 다른 가족에게 내 장점의 그림자인 상상력이 없는 일은, 당연하다 못해 응당하다.
이렇듯 내가 가족으로 인해 가장 괴로워하는 부분은 대부분 내 ‘장점의 그림자’일 경우가 많다. 사람은 나는 잘하지만 남은 못하는 부분에 유난히 촉각을 곤두세우니까. 상대가 못하는 것을 나도 못하면 따질 명분이 없으니까. 허나 그 그림자가 싫어서 장점마저 포기한다면 가정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분명 점점 나빠지다가 결국 흩어지겠지. 그러니 사실 합의가 통하지 않건 할 수 없건 간에 그 그림자를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른 가족이 가진 장점의 그림자와 치환하는 수밖에 없다. 나만 해도 그렇다. 1년 중 360번쯤 다시 물어봐도, 다른 가족이 가진 장점의 그림자에 대해서 계속 잊고 사니까. 말해주면 금세 떠올릴 수 있지만 내 그림자만큼 곱씹지는 않으니 다른 가족이 내게 그러는 것 역시 별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결국에는 <아 제발 좀!>에서 씨익씨익 거리며 끝나지 않고, 끝에 <ㅋㅋㅋㅋ>를 붙일 수밖에 없다. 가족들 역시 각자의 상황에서 우리를 보며 <으이구 진짜> 뒤에 <ㅋㅋㅋㅋ>를 붙이며 마음속으로 넘기고 있을 테니. 아마 우리 가족이 모두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다면, 화자와 장점 종류와 그림자 내용만 바꾼 이와 똑같은 글이 세 개 더 나올 것이다. 우리는 네 식구니까. 다섯 식구였다면 네 개 더 나왔을 테고.
모든 장점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나만 피해보기 위해서는 집단 내에서 나만 모든 장점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테니. 뭐 물론… 그 그림자 간의 크기에 ‘아주 쵸큼’ 차이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근데 어떡해, 남도 아니고.
25. 0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