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의궤 전시를 봅니다. 의궤는국가나 왕실의 중요 행사를 치른 과정을 후대가 참고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조선왕조 내내 꾸준히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의궤 중에도 가장 귀하게 만든 책은 왕이 보기 위한 어림용 의궤로 정조 임금의 명에 의해 강화도에 설치한 외규장각이란 곳에 소중하게 봉안했다고 합니다. 외규장각은 어진 정치를 위해 후대 왕에게 전할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던 왕의 서고였다고 하네요. 아뿔싸그러나 1866년 강화도를 침범한 프랑스 군대에게 이를 빼앗기게 되고 이후 무려 145년이 지나서야 이를 돌려받게 되어 지금에야 보고 있는 것이 이 의궤라지요.
왕의 서고 (국립박물관)
하지만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잘 와닿지는 않습니다. 얼핏 듣고 보아도 이 양식은 아무래도 공무원용 공문서이기 때문일 것이지요. 일을 빈틈 없이 처리하시 위한 규정집 정도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러니 재미가 있을 리는 만무하지요.게다가 공무원도 아닌데 흥미가 가겠습니까? 공무원은 더욱 잔저리를 칠지도요. 조금은 신기하지만 작은 그림들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의궤집 (국립박물관)
옴마나 그런데 우연히 필연인 것처럼 의궤 전시를 보고 난 후 흥미와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책을 만나버렸지 뭡니까. 책의 전체에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그림을 보며 아까 본 의궤의 그림과 얼추 비슷하다 했는데 역시 그런 것이었지요. 어디서 본 공무원용 규정집. 이번에는 '기로소'에 들어가는 그림과 설명이 자세하게 곁들인 '기해기사첩'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실린 책을 만났기 때문입니다.책을 책으로 설명하니 이쪽이 더 흥미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다
1719년은 숙종 임금 이순이 59세 되던 해였습니다. 일 년 후면 6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데 세자와 두 왕자는 부왕이 한 해 일찍 기로소에 들어가길 청하였지요. 이는 태조 이성계 이후 임금이 두 번째로 기로소에 들어가는 사건으로 삼백 년 만의 경사였다네요.
경현당에서 기로신들을 위한 전치를 베풀다
기로소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 문신들이 들어가는 관료사회에서 영예로운 모임이었습니다. 노인정, 아니 원로원이나 고위관료 퇴직 모임 같은 느낌이었을까요? 왕은 신하들과 달리 나이 60세가 되면 기로소에 들어갔는데 19대 임금인 숙종 전에는 태조 이성계를 제외한 17명의 임금이 60세까지 살았던 왕이 없었기에 이런 큰 경사를 맞이하여 일 년 일찍 기로소에 들어가길 청하였던 것이지요. 하여튼 이때도 신하들의 아부부심이란? 이때 기로신들도 불과 열 명에 불과했기에 특별 연회를 열어가며 이러한 국가 경사를 그림과 글로 남긴 것이 '기해기사첩'이라 합니다.숙종 이후로는 장수하였던 임금이었던 영조가 기로소에들어갈 수 있었다고하니 이때 개고생 해서 만든 이 공무 규정집이 유용하게 쓰였을 수도 있겠지요.
기로신들의 행차
외규장각 의궤 전시를 보고 난 후 이 책을 보니 비로소 그 규정집의 중요성이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왜냐하면조선시대의 이 꼼꼼한 보고서의 용도를 이제야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의궤는 한마디로 궁중 보고서라고 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해 봐서 알지만 일은 어떻게 하나요? 전에 비슷했던 일을 그대로 베껴서 토씨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따라서 하지요. 공무원이 특히 그럴 것으로 추정하지만 사기업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창조적 기지를 발휘했다가는 무사안일에 전에 것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고 핀잔받기 일쑤였으니까요. 아무튼 조선의 공무원들은 이 보고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였겠지요. 더군다나 그것을 그림으로 남겨 더욱 이해하기 쉽게 한눈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이 보고서가 조선시대에 이미 3차원 첨단 비주얼 보고서로 기록되었다는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연회용 술 항아리
비주얼 보고서이기에 그림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그 디테일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이를테면 연회를 묘사한 술 항아리 하나에도 용의 무늬가 그려진 항아리는 왕을 위한 술 항아리였으며 무늬가 없는 항아리는 세자와 신하들을 위한 술 항아리였다는 사실 같은 것이지요. 글로 설명하기 힘든 디테일을 그림을 통해 이해를 돕고 자세히 표하였으니확실히 조선은 강력하고 잘 정돈된 왕권과 공무원의 사회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저러나 3백 년 만에 때아닌 숙종 임금의 장수로 인해 '기해기사첩'을 만들어야 했던 공무원이나 부지런한 정조 임금의 '외규장각 의궤'를 만들어야 했던 공무원들은 뺑이 좀 쳤겠던데요. 그래도 능력 있는 임금이었으니 중요한 보고서도 남고 후대에 절대 참고도 되었겠지요. 그렇지 못한 임금을 만나면 맨날 해 먹는 자료를 없애고 숨기고 변명과 거짓말 근거 자료를 만드느라 뺑이를 쳤을 테니 그거 보단 나았을테나까요. 아 다 조선시대 공무원 이야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