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가 여의치 않는 날에는 읽기를합니다. 그런데 쓰기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읽기의 컨디션도 마찬가지로그리 좋지 않더군요. 요리를 만들어도 맛을 잘 내지 못한 상태는 요리를 먹어도 맛을 제대로 잘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해진미라도 몸이 받아야 맛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넘기기 쉬운 책을 골랐습니다. 아니 쉽기 보다은 맛에 실패가 없는 책이라 할까요?'책은 도끼다', '여덟 글자'로 이미 '맛'이 검증되었던박웅현 님의 책입니다. '문장과 순간'이라는 제목도 이번에는 무슨 맛의 요리일까궁금증이 듭니다.
그런데 책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책이 꽉 차 있지 않고 여백이 엄청 많습니다. 책 제목 두세 줄 적어 놓고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페이지가 다반사인가 하며, 문장을캘리그래피로채우며 매 장미다 책 두세 페이지를 또 허비합니다. 그것도 자극적인 붉은 글씨체로 말이지요. 박웅현이 이제는 변했고 책을 쓰기가 싫어서 날로 먹으려나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읽을수록 그것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문장에 대한 컨디션이 좋지 않아 책 읽기가 수월하지 않은 상태인데 여백이 많으니 책이 숭숭 넘어갑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하루가, 아니 몇 시간이 지나기 전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금세 마주하게 될 것 같습니다. 큰 붉은색 캘리그래피로 채운 문장들은 점차 익숙해지며 글씨가 아니라 그림과 같이 시각적으로 더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그는 날로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이 여백에 문장으로 담고 싶었던 것이었나 봅니다.
글의 내용 중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그가 예전에 광고로 만들어 히트 쳤던 문장이 떠오릅니다. 히트는 쳤지만 이 사기꾼 작자가 바로 그였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이지요. 그 당시 그 광고를 내세운 회사에 지원을 했더니 나이가 많다고 떨어졌다는 일화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화자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모 회사가 자기들의 관심사는 '재미'라고 사기를 치는 광고를 보고 코웃음을 치곤 합니다. 광고는 확실히 믿을 것이 못 되긴 하지요. 그렇다고 이 거대한 사기극을 기획하고 불멸의 문장을 집어넣은 그를 비난하려는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처음 책을 낼 즈음 아이였던 저자의 딸이 이제 성년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었고 작자 자신도 이제'나이가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고백이 재미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문장은 사기는 아니었지요. 젊었을 적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진실로 믿고 세상의 벽에 부딪히며 그런 문장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않고 '나이는 속일 수 없다'는 그의 고백처럼 나이가 들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저 또한 그의 처음 책을 마주한 이후 그와 더불어보다 나이가 들어서일것입니다.
실패는 없었습니다. 그의 책은 구멍 숭숭 여전히 사기로 가득한 책이었지만 전혀 날로 먹지 않았지요.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책을 글씨로 꽉꽉 채우지 않아도, 글씨를 검은색이 아이라 붉은색으로 써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듯 보였습니다. 덕분에 '문장'과 가까워져서 읽고 쓰기의 컨디션을 회복하고 글을 다시 씁니다. '문장'이 주는 힘이지요. 여백과 나이의 힘입니다. 읽고 써온 순간들의힘입니다. 그가 오래도록 좀 더 사기치고 숭숭 날로 먹을 만한 신선하고 맛있는 문장들을 좀 더 써주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