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feat 인간의 유통기한
박스도 뜯지 않은 새 제품인데 자세히 보니 유통기한이 지났습니다. 먹는 것은 아니고 뿌리는 것이라 괜찮을까 싶어서 조금 뿌려 향을 맡아봅니다. 여전히 좋은 향이 나고, 먹는 것이 아니므로 바로 죽거나 탈이 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 께름칙한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이런 상황을 가리켜 아끼다 똥 되었다고 합니다. 과소비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빠르게 변하는 세상과 제품에 그때그때마다 소비가 미덕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아끼고 잘 나둬봐야 유통기간이 지나거나 유행이 바뀌어 쓰기 어려우니까요.
그런데 문득 인간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집니다. 자신을 바라본다면 유통기한이 이미 지나버린 것도 같기도 하고, 뭐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아직 유통기한이라 우길 수도 있겠지요. 정년과 같이 일을 할 수 있는 기한이 유통기한 일수도 있고, 예비군 훈련이 끝나면서 이미 전투력의 유통기한은 이미 끝난 줄도 모릅니다.
로맨티스라면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한이 유통기한이라고 주장하겠지요. 이러한 경우 유통기한이 좀 애매해집니다. 자칭 주장하는 사랑의 기한과 타칭 바라보는 사랑의 기한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뭐 제조자가 아직 유통기한이 남았다고 우긴 들 시장에서 유통기한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어렵겠지요. 그렇다면 사랑의 유통기한 또한 이미 지나버렸는지 모르겠네요.
사랑에 있어서 결혼은 한편으로 유통기한의 끝처럼 보입니다. 더 이상 유통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직 유통할 수 있으되 강제로 유통기한을 종료시키는 것이지요. 뭐 불법 유통을 감행하고 암시장에서 거래가 되기도 하지만 말이죠. 자녀가 생기며 유통기한이 끝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신제품에 밀려 더 이상 유통이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그렇지도 않긴 하지만 말이지요.
여하튼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과 육체의 시들해짐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변해간다는 면에서 분명 인간은 유통기한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 해도 신선하게 잘 보관한다든지 아예 발효를 시킨다던지 하다는 식으로 유통기한을 늘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과학과 의학의 힘은 식품의 유통한 뿐만 아니라 확실히 인간의 유통기한을 획기적으로 늘려 주었지요. 겨울 내 죽은 나무처럼 보였던 메마른 가지에서 봄이 되면 녹색 잎이 돋고 어느새 꽃이 피는 것처럼 때에 따라 유통기한을 소생시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고 사랑의 마법이기도 하지만 과학의 힘이 가미된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먹어고 되느냐 마느냐?" 논란이 일자 사용기한이라는 것이 생겨났나 봅니다. 유통기한은 시장에서 팔 수 있는 그야말로 유통기한이고 유통기한이 좀 지나도 아직은 먹을 수 있는 기한이 유통기한 이후로도 꽤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유통기한 조금 지난 것 먹어도 안 죽어요"라는 말이고 다시 말해 인간도 "유통기간 지난 인간도 바로 안 죽어요.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심지어 사랑도 할 수 있어요"라고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삶에 사용기한은 아직 남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봅니다. 기한이 지나면 맛이 물론 예전보다 떨어지긴 하겠지요. 그러나 기한이 오래면 오랠 수록 맛이 더 깊어지고 오래되어야 더 인정받는 와인 같은 주류나, 발효된 장맛과 빵맛을 내며 대대로 내려오는 씨간장과 씨누룩도 있는 법이지요. 유통기한이 점점 다가오는 삶이지만, 혹은 이미 지나버렸을지라도, 부디 이 몸 그냥 부패해버리지 아니하고 때론 술처럼 때론 장처럼 사용기간이 긴 삶을 즐길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더하여 그 삶 유통기한 더 오랜 글로 남길 수 있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