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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Oct 02. 2023

엉덩이에 집착하는 이유

feat 힙하게

소풍 가면 항상 빠지지 않았던 '수건 돌리기' 놀이가 생각납니다. 둥그렇게 빙 둘러앉아 수건이 등 뒤에 놓이면 술래가 되어 재빨리 수건을 놓고 간 사람을 잡아야 했는데 자칫 이 놀이는 로맨스 게임으로 돌변하곤 했지요. 좋아하는 친구 뒤에 두근거림과 함께 수건을 놓고 뛰다 보면 갑분 "나 잡아봐라" 사랑놀이가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좋아하는 친구가 수건을 살짝 놓고 달려갈 때면 일부러 천천히 뛰어서 잡지 않기도 했으니 이 어찌 사랑 수작질이 아니란 말입니까?

문제는 로맨스 게임이라 부르건 사랑 놀이로 부르건 술래에게 잡히면 사랑의 달콤함에 버금가는 무시무시한 벌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벌칙은 이름하여 '엉덩이로 이름쓰기'였습니다. 빨가벋고 엉덩이로 이름을 쓰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이 벌칙이 부끄러웠던지요. 좋아하는 친구 앞에서 엉덩이를 한참 동안 흔들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친구가 잡혀서 엉덩이로 이름을 쓰는 것은 대신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콧방귀를 뀔만한 사소한 벌칙이거나 변태적으로 오인받기 딱 쉬운 벌칙, 둘 중의 하나이겠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런 염려 없는 부끄럽고 사랑스러운 순수의 시절이었지요.

그 문제의 엉덩이에 관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수의사인데 소를 치료하러 갔다가 하필 소의 엉덩이에 손을 대는 순간 유성이 떨어지며 엉덩이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이 본 것을 볼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기지요. 그래서 시작 전부터 이 드라마는 변태 드라마로 오인받게 됩니다. 주인공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곤 하지만 그래도 엉덩이를 만지는 것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지요. 하지만 엉덩이로 이름 쓰는 것만큼이나  부끄럽지만 사랑스럽게 그 경계를 잘 풀어나갔습니다.

엉덩이를 만지면 그 람이 본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능력은 수의사에게는 최고의 능력이긴 하지요. 동물이 아픈 이유를 동물의 엉덩이를 만져 동물의 시선과 행적을 보고 귀신 같이 알아낼 수 있거든요. 하지만 조용했던 시골 마을에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며 이 능력은 무시무시한 살인마를 잡는데 사용됩니다.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엉덩이를 만질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되는 이유이지요. 그것도 그 부위가 하필 엉덩이인 만큼 자연스럽게 만져봐야 하는 것이고요.

엉덩이?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엉덩이를 만질 생각에 빠진 것처럼 엉덩이 글을 쓰다보니 머릿속이 온통 엉덩이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인간은 엉덩이로 이름도 쓰고 엉덩이로 춤도 추고 이렇게 엉덩이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요?


무려 십분 이상의 고밀도 연구 끝에 그것은 바로 "꼬리가 없어서 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꼬리를 가볍게 흔들면 쉬울텐데 꼬리가 사라졌으니 엉덩이에 집착하는 것이겠지요. 유혹을 위해 꼬리를 친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꼬리가 없으니 엉덩이를 흔들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꼬리로 이름을 쓰면 쉬운데 꼬리가 없으니 엉덩이로 이름쓰기를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이유를 찾고나니 기분이 좋아져 꼬리를, 아니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 봅니다. 꼬리만큼  흔들리지가 않습니다. 역시 엉덩이에 집착은 꼬리의 상실감 때문인가 봅니다. 순수했던 '엉덩이로 이름쓰기' 놀이의 상실도 마찬가지겠지요.

"내 잃어버린 꼬리 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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