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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Nov 18. 2021

글 묻어놓는 다람쥐

도토리와 글과 밤과 책

# 다람쥐


다람쥐는 땅을 파고 도토리며 밤을 묻어 두었다가 꺼내 먹으며 겨울을 나지요. 저도 다람쥐처럼 글을 여기저기 묻어 놓는 것을 좋아하였지요. 각종 카페며, 블로그며, 심지어는 싸이월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도 그림 대신 글들을 묻어 놓고 싶어 했으니까요.


# 썩은 도토리 안 썩은 도토리


다람쥐가 그러하듯 저도 글을 남이 볼세라 몰래  비공개로 꼭꼭 숨겨 묻어 놓는 편입니다. 다람쥐도 도토리를 묻어 놓은 곳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까먹기도 하듯이, 저도 글을 묻어 놓고 잊을 때가 많아요. 까먹고 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나 그 글을 어쩌다 파 보았을 때, 도토리도 그렇듯이 때 지난 글들도 대부분 썩어 버렸을 때가 많지요.

그때 왜 그런 글들을 왜 거기다 묻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썩은 글이 되기도 하고, 그때는 뭔가 필을 쫙 받았는데 지나고 나니 별일 아니어서 버려야 할 글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다가는 원래부터 썩어 있던 글을,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글을 끄적여서, 묻어 놓았을 때도 있었죠. 도토리를 빼았길세라, 빨리 글을 감춰놔야겠다는 맘이 급했나 봅니다.


그래도 가끔은 흙을 툭툭 털고 먼지를 훅훅 불어주면 아직 먹을 만한 도토리를 발견하기도 하지요. 상한 부분을 조금 도려내면 쓸만한 글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직은 안 익어서 떫은 도토리였다가도 시기가 이르러 잘 익음직한 글로 돌려 깎아내 윤을 낼 만한 도토리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이러다 보니 묻어 놓은 곳을 발견했는데 썩은 도토리와 그렇지 않은 글을 구분해 내는 것도 일이긴 합니다. 묻어 놓았던 걸 그냥 포기하자니 아깝고 막상 파 보니 썩은 글이 많지요. 그래도 도토리가 귀해질 때면 조금 썩은 글이라도 그게 어디겠어요. 잘 깎아내면 아직 먹을만하지요.


# 익은 도토리 신선한 도토리


그래서 묻어 놓은 도토리처럼 묻어 놓은 것을 파서 먹는 글은 익은 맛이 나지요. 잘 돌려 다시 깎으면 달짝지근하기도 합니다. 그에 비하여 막 발견하여 먹는 글은 신선함이 있지요. 이제 막 발견한 도토리 마냥 새코롬 합니다.


# 밤


가끔은 도토리보다 큰 밤을 발견하면, 반은 그냥 먹고 반은 묻어 놓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쓴 글들이지요. 책을 읽는데도 시간이 꽤 걸릴뿐더러, 읽고 뭔가를 쓰는데도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밤을 묻어 놓는 데는 도토리보다 두배는 더 걸리지요.

그래도 쓰는 것은 읽는 것과 비례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밤나무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도토리만으로는 긴 겨울을 날 수가 없지요. 역시 밤나무에서 큼지막한 밤을 먹고 묻기도 해 놔야 기운을 낼 수가 있어요.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고 밤을 먹어야 도토리도 찾을 수도 있다니까요.


# 욕심쟁이


다람쥐가 볼에 밤을 잔뜩 물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읽지도 못한 책이 한가득인데 또다시 맛있는 책이라고 물어온 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욕심쟁이지요 다람쥐는 밤 욕심쟁이 저는 책 욕심쟁이입니다. 


# 겨울나기


낙엽이 지고 겨울이 다시 오고 있네요. 도토리도 묻고 밤도 새로 숨겨 놓아야 하는데 묻어 놓은 글만 꺼내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합니다. 어디다 또 도토리를 묻어 놓았을까요? 밤은 역시 어렵습니다. 다람쥐는 올 겨울도 잘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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