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룬 Apr 15. 2022

#01. 까만 연필

처음을 시작하는






★★★

설렘과 떨림이 모든 선에 드러남.

차마 힘을 줄 수 없던 초보의 소심한 터치가 아쉬움.  실은 별 두 개도 어려우나, 시도를 칭찬하는 차원에서 (오히려) 별 하나 추가함.





   숙소의 이름이 새겨진 까만 연필은, 그곳에서 경험한 쾌적한 디테일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이었다.


   장난감이 발에 차이지 고도 안전한, 아이에게 호의적이고 우리에겐 안락한 곳을 찾아 떠난 호캉스였다. 낯설고 달콤한 향기의 바디용품이 손이 닿는 곳마다 채워져 있었고, 장식적인 로비의  앞에선 아이의 모든 움직임은 찍는 대로 작품이 되었. 그리고 서랍 안에 연필, 연필이 있었다.  

   대부분의 호텔에는 가벼운 필기도구로 볼펜과 메모지가 준비되어있다. 어디를 가든 평소에 사용하는 펜을 지니지만, 펜의 필기감이나 메모지의 종류호텔마다 다르기에, 준비되어 있다면 의자에  잡고 앉아  번씩 사용해본다. 방문한 호텔의 이름을 대문자로 적거나, 예상 저녁 메뉴를 나열하거나, 창밖의 나무를 뼈대만 그려보는 식의 낙서로 채우곤 하면서.

   그런데 연필이라니. 호텔의 서랍에서 연필을 만난  처음이었다. 연필로는 어딘가에서 빌려온 문장을 어야 하는데. 함께 놓아둔 메모지마저 연필이 미끄러지지 않고 사각거리며 나아갈  있는 적당한 거침을 가졌다. 이런 섬세함이라니! 예약을 하던 과거의 우리를 칭찬하며, 겉도 속도 까만 연필 덕분에 체크 아웃을 하기도 전에 숙소 후기에  다섯 개를 찍었다.


   연필의 이로움은 지울 수 있음에 있다.  

민망한 실수, 얼굴이 빨개질 서툰 흔적도 연필로 썼다면 괜찮아진다. 생각보다  되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끄러워서, 틀려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지우고 싶은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연필로 쓰면 지울  있다. 그 모든 이유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지울  있으려면 연필로 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인지 곁에 , 연필이 있. 혼자서 하는 일에도 한없이 조심스러운 사람에게, 연필은 수백 번의 시도를 부추긴다. 마음대로  내려가고도 지우면 그만이라는 만만한 감각 덕분에 나는 용감해진다.

   

요즘 내가 사용하는 연필들/ 이중섭 기념관,문우당에서 구입한 까만연필

   


   떠다니는 아이디어를 빠르게 잡아둘 때는 연필이다. 글이 시작되기 , 망설임과 치밀함을 거치기 훨씬 전의 얼개 과정도 연필로다. 하루에도 여러  추가 항목이 생기는 '오늘의  ' 같은 메모를 거칠게 남길 때도 연필이지.

   나의  끝을, 하루를, 그래서 결국엔 나를 써가 연필은 모든 순간을 나만의 기록으로 만든. 그렇게 쓰인, 이전에 없던  글은 결국 조금  나아진 내가 된다.            

   손으로 써내는 모든 시작에 연필이 있다.


   부드러운 연필로 그림까지 그려낸다면  의 흐름이 더욱 아름답겠으나, 나는 연필로 글만 쓴다.

   그저 간단한 스케치라도 배우자며 화실을 찾았던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재능을 숨긴 늦깎이 화가 제자를 기대한 선생님은 기본기를 다지는데 너무나 충실했고, 나는 혹독한 연필질에 질려버렸다.  개월을 티다가 결국 연필(4B한정) 내려놓았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칼로 연필을 깎는 것마저도 너무 즐거웠는데, 선생님 눈에만 보이는 미묘한  긋기의 벽을 넘지 못했고, 연필로 그림을 그려내는  내 손을 떠났.


   그렇게 저렇게 포기했던 그림을 아이패드와 펜슬을 도구삼아 조금은 다르게 시작하던 , 무얼 먼저 그려볼까 고심하던 차에 (언제나처럼 손이 닿는 가까운 자리에 있던 덕분으로)  시선을 ,  대상이 다름 아닌 바로 ‘연필이라는 사실, 지금에야 말하지만, 그때의 일을 다행으로 삼을 만큼 낭만적인 연결로 느껴.


   종이를 긁고 지나가는 사각거림, 흑심이 닳아 무뎌졌을 때의 퍼석거림, 연필깎이에서  나왔을 때의 뾰족거림, 속에서 심이 부러지는 바람에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끝에만 느껴지는 흔들거림까지 연필을  사람만 아는 감각이 즐겁다. 그런 즐거움은 현재의 내가 연필에 대한 글을  수도 있는 자유로움으로 이어졌다. 기특하다.


   

   오랫동안 아끼는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한다. 

   멀리 들판이 펼쳐진 곳에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둘레를 가늠할  있는 커다란 나무가 있다. 고개가 넘어가도록 올려다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고, 무성한 잎에 하늘의 해가 전부 가려질 만큼 큰, 그늘 아래로 들어서자면 마치 다른 세계로 발을 딛는 듯한 나무이다. 커다란 나무는 비밀이 있는데, 구름의 색과 하늘의 빛이 오묘하게 변하는 어떤 날이 되면 가장 끝에 매달린 가느다란 가지들 중 일부가 스스로 몸을 꺾어 아래로 떨어지고, 떨어진 가지는 나무 그늘이 진 땅에 닿는 순간 연필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그날 그곳을 지나다가 떨어진 연필 하나를 얻게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나무가 품은 이야기를  내려가는 운명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    


   나야말로  나무의 연필을 얻게 된다면, 기꺼이  운명을 받아들이겠다고 오래전부터 다짐했는데......



   클래식한 노란색 육각 연필, 둥근 원색 연필, 자세 교정에도 좋은 삼각 연필이 인기를 유지하던 무렵이었다. 까만 연필은 아직 흔하지 않던 때였고. 그런데  숙소를 방문한 이후로 신기하게도 여행지마다 까만 연필이 있었다. 덕분에 부지런히 사모으고, 깎아 쓰고, 나눠주고, 잃어버리기도 하면서 여전히  '는’ 중이다.

  다만 모든 시작의 ‘처음 되어준 연필들 틈에서, 내게로 와 특별해진  까만 연필만은 8년이 넘도록 조금씩 아껴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기의 처음을 시작하며 나의 까만 연필을 그려보았다.  



   







⠀⠀⠀⠀⠀⠀⠀⠀⠀⠀⠀⠀⠀⠀⠀⠀⠀




⠀⠀⠀⠀⠀⠀⠀⠀⠀⠀


이전 01화 스무고개 - intro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