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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Apr 08. 2022

스무고개 - intro

모든 처음 중, 하나의 처음으로

  그림을 보는 시간과 공간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미술관의 높고 긴 벽 사이를 거닐며 유독 작게 느껴지는 순간이 마음에 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에 들어 오는 낯선 설렘이 나를 흔들고, 그 어느 때보다 열린 사람이 되어 있는 대로 흔들리는 기분은 근사하다. 있는 줄도 몰랐던 손톱 밑의 살 끝이 찌릿한 날도 있다. 선물 같은 순간은 내 몸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나는 다시 한번 미술관을, 전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슬프고 지칠 때 찾아가기보다, 우연히 들러 예상 밖의 호사를 누리고 돌아올 때가 더 좋다. 좋아하지만 기대하지 않음으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지킨다. 관람 후에, 유난히 나 자신과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내 들뜨게 만드는 그 에너지가 적어도 일주일은 나를 살게 한다. 복닥거리는 시간들을 웃으면서 흘려보낼 수 있는 여유 있는 에너지 말이다.


  그럼. 그렇담. 그렇게 그림이 좋다면, 직접 그려봄 직도 한데...

어째서 화방을 구경하고, 물감을 사두고, 붓으로 장바구니를 채우며, 코로나로 캔버스 수급이 어렵다는 소식에 덩달아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그림을 직접 그리는 일만 빼놓았을까. 


   시작이 어려운 이유를, 모른 척했던 이유를 실은 알고 있었다.

잘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충분한 계획을 세우고 성공 가능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서야 달려드는 못난 완벽주의자다. 마음의 눈으로는 대작이지만 손으로는 정체모를 스케치를 낳는 수준을 알기에 ‘그림을 그린다’는 문장을 차마 나 자신과 이어 놓을 수 없었다. 불가한 일로 생각하고 살았다. 감히 '그냥’ 한 번 해볼 수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아이를 보고 깨달았다.

인생에 찾아오는 ‘처음’은 끝이 없다는 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적응을 하고, 저만의 느낌대로 즐겁게 초딩 라이프를 살던 날이었다.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아니 다 키웠구나 싶어 한숨 돌리려는데, 여전히 돌아서면 아이가 맞닥뜨리는 '처음' 이 넘쳤다. 어떻게 시작하는지 소개를 맡았던 나의 임무는 계속되었다. 아이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아이가 피워낸 작은 용기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엄지 척! 목소리를 높여 칭찬해주는 일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문득 내가 아이의 떨림을 얼마나 공감하는 걸까 물음표가 생겼다.

주변은 언제나 익숙하게 정리되어 있고, 변화가 드문 나의 일상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처음'이 불러오는 긴장과 떨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안주한 내가 보내는 파이팅이 아이에게 닿으려나, 영혼 없이 들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중에, 수없이 외쳐댄 응원의 말들이 아이 주변에서 넘쳐 나와 내 옆자리까지 흘렀다. 주먹을 꼭 쥐면 생겨나던 아이의 용기가 내게도 나눠졌다.


  아이가 겪어 나가는 수많은 처음이, 내심 부러웠던 것이다.

초보이고, 처음이고, 서툴 수 있는 시절.

그냥 한 번 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시간 따라 그저 흐르다가 어딘가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사라져도 그만인, 해와 익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마침 눈앞에 아이패드와 펜슬이 있었다.

나에게 이런 생각이 찾아올 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나의 겨울이 가져다 놓은 기기들이다.

화려하고 빠르게 편집된 그리기 영상들은 눈이 돌아갔다. 화려한 기준이 허들이 되지 않도록 그 영상 속 앱이 아닌, 친숙한 이름의 스케치북 앱을 설치했다.



   그렇게 어느 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루었던 길고 긴 시간은 실은 아껴둔 시간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펜을 들고 있던 시간에도 기대는 없었다.

처음 하는 일은 서툴고 어설픈 게 당연하니, 잘 못하면 어때 하고 있는 걸, 일단 한 번 해보자.

다정한 말들이 나를 향했다.



  따라 그리기, 보고 그리기는 초보의 입장에서 가장 합당한 선택이었다. 무얼 그릴지 대상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일은 뜻밖의 즐거움이 되었다. 내 시선을 끄는, 그리는 동안 다음을 기약하며 진작부터 찜해둔, 그리기 어렵지 않은 (사실 그 정도를 판단할 수준도 아니었지만) 물건들을 하나 둘 선별하여 책상에 올렸다.



  그렇게 그려낸 그림과 고르고 고른 물건들, 그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고 간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딱 스무개만 그려봐야지 한다. 이제 그 첫 고개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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