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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Jul 21. 2022

#06. 피렌체

열쇠고리는 빨개, 빨가면


★★★★★

스웨이드의, 빨강의 끌림. 와우!



   열쇠가 걸리지 않은 빨간색 열쇠고리.

아름답지만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담아두는 상자가 있다.  안에  오랜 시간 머물렀으나 여전히 새것인 여행지의 기념품, 열쇠고리다.



  호랑이 담요만큼은 아니지만, 쓸어내리고 쓸어 올리는 잔잔한 즐거움이 있던, 보드라운 포근함  물건의 강점이었다.  줄이 분명한 실은 도톰한 두께 때문인지 바늘이 움직인 방향에 따라 다른 빛을 내었는데, 앉은자리에서 컵받침 열두 개를 바느질  사람으로서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었다. 눌러 새겨진 문장의 무늬도 반쯤 가려진 듯한 신비한 느낌이었다.

   멋진 물건, 이걸 그려낼  있는가 하는 일이 문제였지만.


  일단, 넓은 브러시로 빨간색 바탕을 시원하게 색칠했다.


   빨강.

열정적인, 강렬한, 뜨거움의 상징. 태양의 색이니  타오르고, 피의 색이기도  두려움이 깃드는 .

사실 빨강이 지닌 표현들은 나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는 이 색깔이 좋았다. 낯선 이들 앞에서 좋아하는 색깔을 발표 면 잇따르는 뻔한 기대에 잠 딴청을 우거나 강하게 부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한참 동안 빨강이었다.


   깨우는 빨강.

잠에서 말고, 총기가 깨어나는  같았다.  하얀색이나 노란색만큼 빛과 가깝지 않지만 가장 밝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는 타오르는 태양이 우주를 지나며  지구가 타지 않을 만큼만 빛을 내는 거라 생각했다. 눈이 부신 밝은 빛은 위대한 배려의 적절한 결과물이었 내게 빨강의 빛깔이  증거였다. 그리고 채도가 높은 빨간색에는 다른 색과 쉽게 섞이지 않을  같은 단호함이 느껴졌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빨강 자신을 실감하게 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브이넥 빨간 니트를 입으면 얼굴이 환해 보인다는 말을 듣곤 했다. 크리스마스가 있는 한겨울 시즌의 각종 행사에 제격이었고, 매서운 추위 포근히  것도 당연했다.  피아노 건반 커버 의혹을 받던 빨간 목도리도 있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와 맞은  크리스마스에 그걸 꺼내 두르고는 나는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고 놀았다. 아이와 빨강, 어울린 둘은 사랑스러웠고, 아껴 두르고 소중히 보관한 시간은 뿌듯했다. 오래된 빨강은 새로운 자리에서도 변함없이 밝은 빛을 발했다. 한여름엔 피해야  컬러 같지만, 사실 빨강에는 장마의 꿉꿉함을 이겨내는 청량감도 있다. 정말 오랜만에  은 빨간 리넨 브이넥 원피스 덕분에 오죽헌의 처마 끝을 흐르던 빗줄기도, 부스스하게 살아나는 곱슬 앞머리도, 다리 사이로 끼어드는 아이의 장난, 어느 것도 상관없이 나는 여행 내내 설렜다.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  안의 있는  모습은 지금 보아 하나같이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환해진 기분은 하루를 돌고 돌았다. 그 원피스에서 빨간 실이 우스스 떨어져 온 집안을 날아다니는 바람에 결국 떠나보냈고, 지금은 빨간 원피스 한 벌 없는 쓸쓸한 사람이지만…….


   꾸준한 다이어리 사용자 모임의 회원 나는 지금까지 쓰고 모아둔 다이어리가 수십 권이다. 

연말이면 이듬해의 다이어리를 고르는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데 주로 사용하는 내지 스타일은 정해져 있어, 고민의 끝은 언제나 커버다. 단조로움을 덜기 위해 혹은 지루한 사람은 아니려고 올해와 다른 색깔을 고르는 것이 암묵적 기준이고, 나름 매우 엄격하게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수년간 쌓은 다이어리들을 모아 두고 보면 빨강- 회색- 진빨강- 노랑- 빨강 같은 오렌지- 블루블랙- 다시 빨강, 이런 식이다. 지난 연말에도 2022년은 그린 감성으로 하겠다며 단단히 마음먹고 나가, 당당히 들고 들어온 것은 선명  다이어리였다.


   늘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마도 남아있는) 기억 속에서, 인생 최초로 잃어버린 물건 바로 빨간 우산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물건이 생기면 제자리를 정해주었기 때문에, 웬만해선 무언가 잃어버리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당시 동료 길가다  생각이 나서 진작에 사두고는 선물로 주고 싶어 생일만을 기다렸다가 건넨, 바로  우산을 정말 감쪽같이 잃어버렸다. 제법 아껴 쓰며 정이 들었고, 의미가 큰 선물이라서 가족들을 동원해 일주일을 찾아 헤맸고, 결국 찾지 못해 자책하며 시름시름 앓았다. 이제는 우산에 발이 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더 이상 빨간 우산은 사지 않음으로 나의 빨간 우산을 기린다.


—-


   보석반지의 도시, 피렌체는 가죽 제품 . 가벼운 열쇠고리  여행의 기념품으로 적당하니 우리 일행은 공방을 돌며 궁극의 열쇠고리를 찾아 나섰다. 다들 장인의 손길이 묻어난 빛바랜 가죽 열쇠고리를 골랐는데, 돌아와 보니  때문인지  것은 스웨이드. 스웨이드도 가죽이긴 하지만  느낌이  느낌은 니니 말이다. 심지어 하트 모양은 어떤 경우에도 다음의 다음으로 미루는 디자인인데  열쇠고리가 내 손에 있었다. 


 보기 좋은 떡일수록 먹기가, 아니지 그리기가 어렵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마땅한 대상을 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기 쉽거나 앞서 그린 것과 비슷한 툴로 표현 가능한 걸로 고르면 수월했을 텐데 러지 은 이유를 모르겠다. 그저 왜인지 모르게 끌리던 물건을 선택하고, 그런 다음엔 그렸다.

   우연을 따라 등장한 이야기들은 실은 내 곁에 있었는, 지금에야 발견하게 된 듯싶다.  이야기에 혼자 정해둔 마감 기한을 번번이 놓치지만, 우연의 덕을 보는 중인 이번에도, 역시나 고마운 시간이다.


  낯선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주 들여다보는 게 수였다. 자꾸 들여다보니  가까이 알게 되는 했고. 가까워지 멀리 있는 일도 생생하게 보인다.  

  

 장바구니에 한참 머물던 빨간 원피스를 주문할까 보다. 환해진  얼굴이 오랜만에 보고 싶어졌다. 추억도 부르고  선물도 르는, 열쇠고리를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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