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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Apr 14. 2023

#11. 알밤

차차 알아갑시다

★★★★

알이 꽉 들어찬 실한 알밤이 분명함






   밤이나 고구마, 감자, 옥수수 같은 먹거리의 제철을 잘 기억했다가, 한 계절 전부터 김이 솔솔 나는 장면을 고대하고, 맞춤 맞게 구입해서, 그 순간을 만끽하는데 진심인 사람들이 있다.

  많이들 그렇게 살고 있지만, 남 일처럼 말하게 되는 이유는 한 문장에 담긴 과정들이 하나같이 반드시 적어두어야 하고, 알람 설정 필수에, 당일 아침이라면 냉장고장 위의 선반에서 큰 냄비와 찜기를 일찌감치 내려 세팅해두어야만 할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미션들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메뉴를 떠올리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해내는 과정은 험난하다.

먹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아서, 알약으로 식사를 대체할지 모른다는 어떤 미래의 식사 방법에 진작부터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이 또 나다. 그럼에도 제철을 챙기는 부지런한 이들 틈에 끼는 일이 요원한 걸 보면 타고나길 다소 부족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저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지지고 볶는데, 최선까지는 아니어도 적절한 에너지를 쓰고 있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건 분명하다.

   다행히 한 집에서 나고 자랐으나 다르게 생긴 동생이 부지런한 그들 중 하나라서, 각종 제철 먹거리의 정보를 흘려듣는다. 심지어 장르 초월의 네이밍 대표 ‘곱창김’이 나오는 시기가 짧다는 것도, 그래서 바로 그때 먹거나 사두어야 한다는 데 맞장구도 치면서 남들처럼 살기도 한다. 후천적 노력도 만만치 않은 걸 보면, 정말 이쪽으로는 소질이 없음이다. 다만 먹기를 즐기고, 그 과정과 결과를 누리는 사람들은 확실히 에너지가 넘치고 하루 중 세 번은 신이 나니까,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식사 때가 되어도 당황하지 않기 위해 월요일 오전이면 한 주의 식단을 정하고 장을 본다. 간단하지만 일주일 단위로 꾸리는 일이 이제는 익숙하다. 끝내주지 않아도 적당히 맛과 양을 조절할 줄 알고,  집 근처에 아플 때 생각나는 맛있는 반찬가게도 있고, 손에 익어 자신 있다 하는 메뉴가 몇 가지 있으므로, 약간의 아쉬움은 그러려니 두고, 이만하면 충분하다 여기며 사는 중이다.  다 잘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인데.

나에겐, 우리 가족에겐 충분히 행복한 식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과 엄마가 가을 알밤을 한 솥 가득 쪄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가득한 찐 밤들. 밤나무 하나를 털었음직한 양이었다.  몇 번이나 쪘을까, 다 먹을 수 있을까, 사이다는 어디에…… 물음표들이 목 끝에 걸려있는데, 함께 간 그이는 어느새 테이블에 합류해 앉았다.

그이는 알밤을 반으로 가른 뒤 떠먹고, 파먹기 시작했다. 야무지게.

문득 궁금했다.


"자기 혹시 밤 좋아해?"

좋아한단다.

"진짜로?"

진짜로.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연애 11년, 결혼한 지 10년도 훌쩍 넘었으니까 (10주년 이후로는 연 단위는 세지 않고 있다), 반 평생을 알고 지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아는데...... 그이가 밤을 좋아한다니. 먹고 난 껍데기가 저렇게나 빠른 속도로 그릇을 채울 정도로 좋아한다는데 여태껏 그 정보에 대해서 눈치도 못 챘다니. 숨긴 것인가, 그랬다면 감쪽같았어.


   우리 주방에 밤이 등장했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아이가 아직 아기였을 때, 잘 삶아 으깬 밤에 초록마을 쌀가루를 섞어 치대고, 작은 막대 모양으로 만들어 한 번 더 찌면 은은한 단맛이 부드럽게 씹히는 핑거푸드가 되었다. 영양 만점 밤이라길래 친한 식재료는 아니었지만, 초보 엄마가 나름 최선을 다해 개발해 낸 간식이었다. 하나하나 쏙쏙 잘 집어먹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 맘 때 자주 밤을 쪘던 것 같다. 그런데 기억 속 그 장면에 그이가 붙어 앉아 한 두 개라도 까먹던 모습은 없다. 그 시절을 물으니, 아이 먹을 음식에 손댈 수 없었다는 초보 아빠의 착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랬구나.


   그이는,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사람이다.

간이 싱거우면 원래 담백한 걸 좋아하니 괜찮다 하고(정말 담백한 거 좋아함), 짜면 한 숟가락에 올라가는 밥의 양이 그저 수북해진다. 물론 좋아하는 음식들이 있긴 한데 나랑 겹치는 건 이미 자주 먹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건 혼자 먹기 싫어서 굳이 특정 메뉴들을 발표하거나 주장하지 않는 편이다. 그이의 요리에 내 표정은 변화를 겪는 반면, 그이는 내가 지금까지 차려 낸 어떤  음식에 대해서도 맛을 비판하거나 지적하는 일이 없다. 나의 요리 실력이 이렇다 할 극적 성장을 거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언제나 오케이 반응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가도, 가뜩이나 쉽게 닳아버리는 요리 에너지를 가진 나에게 수고를 후회하게 만드는 말들이 날아온다면, 우리 가족은 이미 알약으로 식사를 하고 있겠지.


   그런 그이가 야곰야곰 알밤을 먹는 모습을 보니 낯설기도, 귀엽기도 했다. 새삼 고마웠다.

그래서! 작정하고 다음 가을을 기다렸다. 오며 가며 들었던 정보를 바탕으로 무려 공주의 가을 알밤을 최상급으로 한 상자 주문했고, 요리쟁이들의 밤 삶는 비법들을 익혀두었다.

   그렇게 찾아온 어느 가을밤. 저녁 식사 후, 입이 심심할 즈음에 짠 하고 먹을 수 있도록, 온기와 부드러움이 가장 맛있는 때를 맞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냄비에 불을 켜두었다. 한 상자를 다 먹을 때까지 부지런히 그랬다.

   양푼에 수북이 담긴 찐 밤과 칼, 티스푼이 든 쟁반을 들고 텔레비전 앞에 앉는 그이의 얼굴은 매우 밝음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알밤을 반으로 툭 가르는 칼놀림으로 손바닥에 빨간 줄이 생겼지만, 밤을 맛있게 먹으려고 식사량을 조절하기도 하는 치밀한 사람이 되었다. 최상급 공주 알밤은 역시나 알차서 그해 가을밤은 내내 달달했고 포근했다.


   아름다운 장면이었고, 신나고 즐거운 밤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후 가을마다 연례행사처럼 밤을 주문하거나 그러진 않는다. 이듬해 가을엔 (아마도 더 좋은 일이 있었겠지) 밤을 잊었고, 밤 없이도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중이다. 그런 가을이, 그런 알밤이 있었다는 추억을 품고.


   긴 시간을 함께 한 사람에 대한 호기로, 서로에 대해 전부는 아니어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방심하지 말라고 이렇게 한 번씩 작은 충격이 있다. 밤을 좋아한다니, 그걸 내가 몰랐다니...... 그 상황은 낯설었고, 우리 사이가 좀 다르게,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좀 더 같이 살다 보면 서로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들을 결국 다 알게 되려나, 그이와 나는 서로의 호와 불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가 될까.  

   아직도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니 차차 알아갑시다, 하며 손을 맞잡고 흔들었던 순간엔 웃음이 났다. 살아봐야 알 일이지만, 아직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니 다행이다 그런다.

   인연이 오래되었음에도 연인처럼 지낼 수 있겠구나 하면서.



최상급 공주 가을 알밤 중에서 가장 동글고 손에 쏙 들어오던 알밤을 골라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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