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고
처음엔 단어입니다.
단어 교재를 골라 적절한 분량을 정한 뒤 다음 시간까지 외워오는 것이 아마도, 거의 모든 영어 수업의 첫 번째 과제일 것입니다.
접근이 쉬운 학습 법이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단어 암기가 불러들이는 갈등과 고난이 만만치 않습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학생들조차, 단어는 당연히 외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앞으로 내내 영어로 된 책을 읽어야 하니 외우는 것이지만, 당연하다는 설명만으로는 학생들을 책상 앞으로 불러 앉히기 어렵습니다.
단어를 ‘외우는’ 이유
낯선 언어이니, 익숙해지려면 일단 자주 보아야 합니다. 흥미를 느끼게 될 때까지, 감을 잡으며 아주 약하게나마 재미를 느낄 때까지 가능한 물리적 노출의 빈도를 올려야 합니다. 어릴 때야 챈트도 부르고 그림 따라 글 따라 스토리북을 읽을 여유가 있지만, 세상만사를 주제로 다루는 영어 지문들을 읽어내야 하고 대화 내용도 소통보다는 문제풀이로 들어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노출로 인한 점진적 학습 효과를 기대할 여유가 없습니다. 노래는 유치하고 그림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어느 정도 ‘머리가 큰’ 학령기의 학생들은 새로운 영역을 보다 체계적인 기술로 학습할 준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되었기 때문에, 그에 어울리는 방법이라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학습하고, 심지어 재미도 느낄 수 있습니다. 외우기는 물론 익숙하지 않은 처음엔 서툴고 어려운 학습법이지만, 일반적인 방법을 익히고 나아가 자신만의 암기법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영어 공부에서 짧은 단어들을 수집하듯 외우기 시작하면, 영어 공부가 가능해지는 걸 느낍니다. 학습에 필요한 에너지가 쌓여가기 때문이죠. 암기한 단어가 많아지면서 문장이 읽히고, 낯선 문장 속에서 이전에 외웠던 단어의 의미를 활용하는 동안 영어의 감각을 키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학습한 단어가 쌓여가는 동안, 학습 시간과 학습량이 일정하게 유지되며 이로운 학습 태도를 갖추게 됩니다.
문법은 아무래도 다소간의 개념 설명이 필요하고 독해는 배경지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단어만이 시작과 동시에 안정적으로 혼자 공부가 가능한 영역이라는 사실은 시간을 벌 수 있는 큰 장점이기도 합니다. 시중에 나와있는 수많은 단어책 중 한 권이라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꾸준히만 하면 되니, 거창한 계획을 세울 일도 없습니다. 테스트에 대한 오해를 거두면 성과에 대한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고요. 다만 다른 영역과 달리 단어 학습은 온전히 학생의 몫입니다. 대신 외워줄 수 없고 대신 머릿속에 담아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보면 한 톨의 손해도 없이 결과물 전부가 오롯이 자신의 차지가 되는 공부입니다.
공부의 필요를 인정하고, 학습을 방법론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학생들은 귀찮고 어려워도 곧잘 해냅니다.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결국에는 다시 책을 손에 들게 됩니다. 외우는 일은 엄청난 과업인 듯싶지만, 막상 해나가는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외우기만 하면 되니 별다를 게 없답니다. 욕심을 마음껏 부려도 좋을 공부입니다. 그 끝에 얻게 될 성실함이라는 성취는 그 어떤 재능도 따라잡지 못할 능력이 될 것입니다. 시도하고 견디기를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에 맞는 학습의 때가 있음을, 왔음을 알게 되길 바랍니다. 그 성장을 놓치지 않고 격려해 주는 어른을 만나길 바라고요.
네, 열심히 단어 외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길게 이야기해 줄 수도 있습니다. 부디.
얼마나 외워야 하나.
그보다 우선, 단어를 외우고 난 후 얼마나 기억하는지 질문해 봅니다. 썩 많지는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요. 까먹는다는 가혹한 현실을 반복하고 무뎌졌을 뿐입니다. 어차피 까먹을 텐데 뭐 하러 외우냐 되묻는 짓궂은 학생들은 어느 때나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 다 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잊히는 것보다 남겨진 것이 늘 더 많다는 것이 간과되는 진실입니다. 분명 머릿속에 잘 담기는 단어가 더 많습니다.
많이 외우면 상대적으로 남는 단어도 늘어납니다. 수백 개의 단어 암기가 과제인 학원도 적지 않습니다. 외울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많이 외우면, 네, 전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단어 에너지 풀 충전입니다. 다만,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100개를 한 번에 외우고 지쳐서 일주일을 쉬어 버리는 유형이라면, 아마 매주 새로운 다짐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암기량을 정하는 기준은 절대적인 숫자보다 지속가능성에 두어야 합니다. 하루에 10개씩 날마다 외운다면, 위의 경우보다 같은 기간에 외운 개수는 적지만, 암기력은 더 나아질 것이고 다짐에 필요한 시간도 덜 쓰고 ( 공부 다짐은 책상 정리부터 시작합니다. 오래 걸려요.), 무엇보다 꾸준한 학습 태도가 생길 것입니다. 성실한 공부 습관은 적절한 시기에 엄청난 에너지를 냅니다.
많이 외우기도 좋지만 그보다 꾸준히 외우기, 결국엔 많아집니다.
학원을 다니면 커리큘럼의 진도에 맞추어 암기량이 정해집니다. 단어 과제입니다.
영어 학원이 처음이라면, 적응이 될 때까지는 물리적으로 힘들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수업일 직전에 몰아서 외우기보다 정해진 범위를 날짜에 맞게 하루 기준 분량으로 쪼개어, 날마다 외우도록 합니다. 학생에 따라서 하루 중 오전 오후로 한 번 더 나눌 수도 있습니다. 학원의 진도라는 강제성이 적응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는 도움 수단이길 바랍니다. 앞으로 평생, 쭈욱 그래야 한다면 학생은 막연할 것입니다. 첫 목표는 진도에 맞춘 교재 완독입니다. 그때까지입니다. 단어 교재 완독 후의 성취감은 온전하기에 공부하는 학생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그즈음이면 단어 암기 습관도 자리 잡았을 것이고, 그다음이 궁금할 것입니다. 열심히 외우지 않은 학생은 교재 진도가 끝나도 완독의 성취를 누리지 못합니다. 진도를 다 나간 것과 교재를 온전히 끝까지 보는 것의 차이는 학생 본인만이 아는 일입니다. 과정을 잘 겪어내도록, 스스로 그 경험을 성취하는 데 힘이 되도록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혹, 학원에 다니기 전 혼자서 단어만이라도 시작하려는 학생은 하루를 기준으로 단어량을 정해봅니다.
그 하루는 생각보다 짧으니, 보호자의 열정보다 학생의 결정으로 정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영어라는 교과목이 지겹게 느껴지고, 영어 포기를 외치며 떨어져 나가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단어 암기를 이유로 듭니다. 하루에 5개를 외우겠다고 하면 아쉬워도 보호자가 이를 악물고 그렇게 일단 ‘시작’을 해야 합니다. 진도를 맞춰야 하거나, 또래와의 경쟁이 부재한 환경이라면 과목 정서를 긍정적으로 형성하고, 꾸준한 습관을 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면 나을 것입니다. 단어 암기는 영어 공부의 끝의 끝이 되도록 이어져야 합니다. 결국엔 많아집니다.
다회독
단어 교재는 여러 번을 반복해서 봅니다.
학원에서는 보통 적어도 교재당 2 회독 이상을 진행하며, 학습 강도를 올리기 위해 반복을 전제로 처음부터 높은 수준의 교재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습관이 되기까지가 힘들고, 새 단어가 어렵기는 어느 교재여도 마찬가지이므로, 사실 교재의 난도는 중학교 과정 내, 고등학교 과정 내에서는 상관없습니다. 처음엔 의미를 외우는 정도로, 다음엔 철자, 그다음엔 예문과 동의어 등으로 교재 활용 정도를 확장해 나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전체로 여겨질 때까지, 여러 번 돌려 보아야 합니다. 처음엔 하루 한 챕터 외우기도 힘들지만, 여러 번 보는 과정을 지나며 하루에 두 세 챕터를 외워내는 경험을 하고, 외우지 않은 단어의 뜻을 짐작하는 감각도 갖게 됩니다. 그즈음이면 책이 한 껏 부풀어 올라 있겠죠.
테스트
외우는 것은 각자의 일이고 혼자의 일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외웠든, 혼공에는 체크가 필수! 학원에 치르는 테스트를 체크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학원 단어 시험을 통과하려고 단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혼자 해낸 공부를 점검하는 도구로 학원 시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셀프 테스트를 단어 암기의 마무리 단계로 만들어 두면 더블 체크가 될 것입니다. 방식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암기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전부 까먹는 것이 아닙니다. 남는 게 더 많습니다. 남는 것을 눈을 확인하는 과정이 단어 암기의 마무리입니다.
‘재시’는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입니다.
단어 학습 과정이 처음부터 적절히 이뤄졌다면 어쩌다 걸린 재시쯤이야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과제 자체에 대한 준비가 없어 점검에 임할 수가 없는 상태이고 자리 채우기를 하고 있다면 재시는 암흑의 시간일 뿐입니다.
반복은 영어 공부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재시는 약간의 긴장을 부여하고 과제의 데드라인을 만드는 수단일 뿐입니다. 재시가 싫으면,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외워 준비하면 됩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재시를 보는 학생들은 몇몇으로 한정됩니다. 다른 또래들이 단어 암기 습관을 들일 때, 재시 자체를 강력한 습관으로 삼고 맙니다. 단어만이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학원 안에서 재시가 가장 싫은 사람은 실은 강사들입니다. 샘들 퇴근 시간이 미뤄지지 않게 미리미리 합시다. 학생 여러분 :)
단어 암기는 언어 공부의 시작이자 마지막입니다. 학원 등록 여부와 상관없이 영원히 자기 공부의 영역이기도 하고요. 점검의 기회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면서 모든 공부의 필요조건인 성실한 학습 태도도 쌓아가는 좋은 습관을 꼭 자신의 것으로 만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