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적당히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상처받지 않아 본 사람은, 타인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세상을 단순하게만 이해한다.
그리고 그 상처의 무게는 모두에게 상대적이다. 물론,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큰 사고를 겪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비슷한 정도의 굴곡을 느끼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가지지 못해서, 누군가는 더 가지지 못해서 괴롭고, 누군가는 가족이 없어서, 또 누군가는 가족이 있어서 괴롭다. 사랑하지 못해서 괴롭고, 사랑해서 괴롭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모두에게 인생을 배울 기회도 어느 정도 공평하게 주어진다.
문제는 그러한 고통을 얼마나 훌륭하게 해석했느냐이다. 가난의 고통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전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저 삶의 여러 형태 중 하나로 인식하고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마음으로 전환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전환된 마음은 타인과 세상뿐 아니라 다시 자신을 향한다. 분노와 갈망의 시선은 세상을 한 바퀴 돌아 다시금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그것으로 인간은 또 괴로워한다. 인간은 이렇게, 세상과 자신에 대한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가 만들어낸 해석을 바탕 삼아 다시금 자신을 쌓아가는 존재이다. 이렇게 쌓아 올린 해석의 총체를, 우리는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부른다.
나는 내 마음이 건강한 것에 대해 감사한다. 하지만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은 상처받지 않고, 좋은 일만 겪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내 삶에는 다행히도,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이겨낼 수 있는 고통들이 있었고, 그것을 좋은 교훈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고통이 그렇게 두렵지 않다.
인생이 곧 고통이라는 명제는, 어차피 고통스러우니 삶을 환멸하고 산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무언가를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것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이 찬란한 삶을 그대로, 온전히 즐기고 싶다.
날이 따뜻해지고 꽃이 피는 이 봄날에, 꽃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은 언젠가 또 지겠지만, 그런 생각만 하다가는 봄이 금세 지나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