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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u Feb 08. 2023

철학 1

인문대에서 수업이 끝나고 가파른 경사를 따라 공대 가동 2층으로 올라가면 복도 중앙에 ‘물리학과’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거기서 나는 「역학」, 「현대물리학」, 「기초전자기학」 같은 수업을 들었다. 수강생은 많아야 열 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고, 신입생이 없어 MT나 축제는 못 하는 학과였지만, 그 작은 강의실에 사람들이 모이면 교수도 학생들도 일관되게 ‘물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물리학과는 폐과가 확정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그 학풍은 유지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옛날의 우리 철학과가 문득 그리워지고는 했다.


철학과를 비롯한 9개 학과의 통폐합이 발표가 난 건 2012년 4월이었다. 철학과는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 교수와의 회의에서 학과의 이름을 바꾸어 학과를 존립시키자는 의견이 나왔고, 어느새 회의의 초점은 어느 학과명이 고등학생에게 가장 인기 있을지로 맞추어졌다. 문화콘텐츠라는 이름이 선정되었고, 우리는 학과명을 바꾸는 대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사기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왜 우리 학과의 전신이 철학과이며 하나의 학과에 학생회가 두 개인지, 수업에선 무엇을 가르치는지 설명하려면 자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방송이나 광고에 대해 배우고 싶어 우리 과를 왔다는데, 어떤 수업을 들으라고도, 어떻게 공부하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가끔은 이들을 속이는 사기에 내가 가담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형이상학」, 「불교철학」, 「사회철학」 같은 수업이 우리에게도 있었는데, 어느새인가 외국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알 수 없는 이름의 수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수업 내용은 대개 이름이 바뀌기 전의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교수도 학생들도, 그다지 가르치거나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 과의 수업은 항상 질문 없이 빨리 끝났다.


타과에서 수업을 들으면, 출석부에는 내 소속이 문화콘텐츠로 적혀있어 나는 나를 철학과라고 다시 소개해야만 했다. 과제에도, 시험지에도, 공모전에도 나는 항상 “철학과 12학번”이다. 대다수 교수는 이해해 주었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과 수업에 들어갈 때, 나는 등 뒤에 ‘진보철학’이 큼지막하게 쓰여있는 과점퍼를 자주 입고 갔다. 나는 철학과가 사라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수업을 마치고 과방에 들러 재잘거리는 후배들을 보고 있자면, 또 복잡한 기분에 잠겼다. 나와 지향점은 다르지만, 내가 철학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후배들이었다. 내가 철학과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이들의 권리를 갉아먹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을 위해서 철학과를 빨리 없애야 했고, 결국 또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25대까지 이어진 진보철학이라는 기조를 지우고 새로운 이름을 세웠다. 고등학생 때부터 애착을 갖고 키워온 철학이라는 아이를 내 손으로 묻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래야만 했다.


나의 고집과 이기심을 이해해 준 후배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 말도 안 되는 학과의 사정과 열악한 환경에도, 아이들은 서로를 믿고 잘 뭉쳐주었다. 나는 그때의 우리가 최고의 시절, 최고의 사람들이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철학에 대한 애정이 커지면 후배들에 대한 죄책감이 커지고, 후배들에 대한 애정이 커지면 내 정체성을 지워내야만 하는, 그런 그림자 같은 것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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