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su Mar 06. 2023

거르지 못하고 쓰여진 말들

낙서

노가다 공사 현장 엘리베이터에, ‘은선아 보고 싶다.’라는 낙서가 적혀있다. 쉴 새 없는 노가다 판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엘리베이터. 그 잠깐새에 그는 그녀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8층 작업장의 벽면에는 ‘추락사’라는 섬뜩한 낙서가 적혀있다. 고공에서 작업하는 그는 아마 죽음이 두려웠을 것이다.


절박한 진심은 주로 낙서할 때 많이 튀어나온다. 소리 내 말하지는 못하고, 공책 말미에 자그맣게 적어놓았던 누군가의 이름, 누군가가 보았으면 하고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은 담벼락의 하트를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진심을 숨기고 산 지가 오래되었다. 낙서만큼 솔직한 글은 없다. 소설에서도 시에서도 심지어 일기에서도, 문장을 고르고 생각할수록 거짓말보다는 솔직한 말이 많이 솎아내 진다. 그런 퇴고의 과정이 없는 낙서는, 문득 적어놓고 보면 자기도 몰랐던 진심이 적혀있어서 놀라곤 한다.


은선이가 그의 아내인지, 애인인지, 아니면 헤어진 연인인지는 모른다. 그가 하루 일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들어와 그녀의 품에 안겼을지, 혼자 저녁을 먹고 아무렇지 않은 듯 베개를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었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도, 엘리베이터 한켠 아무도 못 볼 모서리에 당신이 밉다고 적었다.

이전 09화 잃어버린 장난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