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와 공존하는 간호사의 이야기
기억의 재구성
트리거를 이야기하려면 공황의 시작부터 돌아가야 한다.
트리거를 찾으려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말 그대로, 가장 처음.
기억은 중학교 1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따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부족한, 그렇다고 정상이라 부르기엔 어색한 위치.
여자아이들은 무리를 지었고, 나는 그 경계 밖에 있었다.
다만, 우리를 대놓고 싫어하던 다수가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러나 아주 명확하게 우리를 배제했다.
욕설, 무시, 투명인간 취급.
우리는 누구의 선택지도 아니었다. 그저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무리끼리 갈라 벽에 세운 뒤, 한마디만 남겼다.
무언가 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우리 모두를 혼냈고,
“서로 친하게 지내라”는 말만 남겼다.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우리가 소외된 아이들이라는 낙인이었다.
누구도 달라지지 않았고, 선생님도 거기까지였다.
애초에 해결이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보여주기식 조치. 의례적인 충고.
나는 거기서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시절 나는 첫 공황발작이 나타났다. 당시 장난이 많던 남자아이는 내가 공황발작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하며 나를 조롱하였고 당시 나를 싫어하던 다수의 여자아이 무리들과 남자아이들의 일부는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모습과 나의 일부를 더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 머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빠지기 시작했다.
샤워 후 손바닥 위엔 검은 실타래처럼 엉킨 머리카락이 얹혔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걸,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처음으로 공황발작이 왔다.
나는 쓰러졌고,
누군가는 내 모습을 흉내 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른 아이들은 웃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안을 보여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내 안에 처음 자리 잡은 건.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 시절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 그때부터였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왕따 경험이 트리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친구도 있었고, 대학 시절엔 교우관계도 원만했다.
누군가와 다투거나 깊이 상처받은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증상은 더 심해졌을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왜 지금까지, 나는 이토록 흔들리는 걸까.
답을 찾고 싶었지만,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분명 있는데,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허한 추적만 이어졌다.
가족
나는 삼 남매 중 둘째였다.
위로는 오빠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섯 살 어린 동생이 있었다.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늘 늦게 들어왔다.
하교 후 집에 오면, 집은 조용했다.
동생은 나를 잘 따랐고, 나는 그 아이를 보살폈다.
함께 놀기도 했고, 때론 싸우기도 했지만, 정은 깊었다.
아버지는 다정했고, 어머니는 현실적이었다.
부모님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저, 바빴을 뿐이다.
그 시절의 우리 집은 특별할 것도, 특별히 부족할 것도 없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무엇을 문제 삼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
나의 성격
심리검사 결과, 나는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듣는 순간 의아했지만, 생각해 보면 실제로도 그랬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퇴근하면 툭툭 털어냈다.
사람들과 부딪혀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다.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굳이 설명하지도 않았다.
“너는 너고 나는 나.”
이게 내 삶의 기본값이었다.
정신과 의사도 그랬다.
“당신은 강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말이 어딘지 어긋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성격도, 가족도, 인간관계도 무난한데
왜 나는 여전히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중학교 시절을 제외하면, 트리거로 지목할 만한 사건이 없다.
그게 오히려 더 답답했다.
원인을 모르기에,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