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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아 Oct 18. 2024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되지 않도록

 편도 교통비 1,450원. 편의점에서 통신사 할인을 받아야만 더 묵직한 삼각김밥을 사 먹을 수 있는 금액이다. 지하철 개찰구에 카드를 대면 선명하게 찍히는 디지털 숫자는 배고픈 한 끼 식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더더욱 집 근처 편의점을 서성이며 김밥 하나 제 돈 주고 사 먹는 것을 아까워한다.

 도보로 50분가량 소요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새벽같이 일어나 걸어서 등교하고,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후에는 가로등 불빛 하나에 의존하며 걸어서 하교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묵묵히 걸었다. 방학식 당일 영양사 선생님이 나만 따로 불러 우유 한 박스를 챙겨 준 날에는 두 팔과 다리로 집까지 직접 배달했다. 미련할 정도로 고집스러운 습관이었다.


 돈이 없어 사 먹지 못하는 것과 돈이 있어도 사 먹지 못하는 것에는 묘한 차이가 있다. 나는 돈을 쓸 줄 몰랐다. 정확하게 말하면 날 위해서 쓰는 법을 몰랐다. 대학 합격 소식을 듣고 입학하기 전 친구 따라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휴대전화 요금과 주택청약 적금을 포함한 생활비를 직접 마련했다. 대학 등록금은 국가장학금과 교내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한부모가족인 엄마의 소득이 차상위계층 조건을 벗어나게 되면서 소득분위가 떨어졌을 때는 혹여나 몇백만 원의 학비가 청구될까 봐 더 악착같이 학점 관리에 매달렸다. 4년 동안 학교, 집, 아르바이트를 반복했더니 총장상이 주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범생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까운 등록금을 내기 싫었을 뿐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까지 홀로 두 남매를 키운 엄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앳된 얼굴을 벗을 새도 없이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다. 월 이백도 안 되는 금액이 통장에 찍혀도 만족스러웠다. 물욕이 없는 나에게는 충분했다. 명절 수당, 상여금 등 예상외 급여가 추가로 들어오는 날에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엄마랑 아빠에게 준 용돈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저축했다. 복지포인트는 고장 난 가전제품 구입비나 동생 치과 치료비로 사용했다. 도대체 본인에게 쓴 돈은 뭐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하나 꼽자면 대외적인 석상에서 입기 위해 맞춘 양복 한 벌 정도인 것 같다. 그마저도 여태 열 번도 채 안 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깝기만 하다.


 티끌 같은 월급으로 어느새 몇천만 단위의 돈을 모았다. 일 년간 평균 1,500만 원, 비율로 따지자면 월급의 70%를 꼬박 저축한 셈이다. 통장 잔액이 불어 갈수록 붙는 이자 금액도 커졌다. 그럴수록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변경된 이율로 전달보다 이자가 적게 붙으면 불안해졌다. 돈을 더 채워야만 했다. 적금은 적어도 네 개 이상 들어야 했다. 돈을 펑펑 쓰면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되고, 비굴해지고, 신뢰가 깨지고, 결국 끝에 헤어짐이 남는다는 간접 경험에서 온 강박이었다.

 이건 마치 겪어 보지 않은 전쟁 트라우마와도 같다. 한국전쟁을 겪은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쌀이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한다고 한다. 네 가족이 한 달은 거뜬히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임에도 불구하고, 병적으로 쌀통을 채우려고 하는 것은 끔찍한 배고픔이 또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에 취약하다.


 고로, 물질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 EBS 다큐프라임 <천국의 아이들>의 이야기다. 열한 살 여자아이 나디아는 인도네시아 반타 쓰레기 매립장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모은다. 도박으로 돈을 잃은 아빠의 빚을 갚고, 학비를 벌기 위해서다. 아빠는 돈을 벌 의지조차 없지만, 나디아는 하루 여덟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악취가 풀풀 풍기는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있다. 날카로운 병 조각이 살을 관통해 피가 날 때면 아픔에 상처받은 울음을 그치고, 도리어 엄마를 걱정하고 격려한다. 아빠에게 얼굴이 짓밟혀 가출한 오빠를 찾아 나서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에게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달콤한 간식을 선물한다. 의사를 꿈꾸며 자신은 돌보지 않는다. 환하게 웃는다. 거짓말처럼 지구상에서 딸의 역할은 천편일률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동반한다.


 나에게 돈은 쌀이자 쓰레기와 같다. 제 분수에 넘쳐 결국에는 무용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유용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 돌고 돌아 자본주의의 폐해를 불러오는 것. 탐하는 순간 또 다른 딸이 대물림되는 사슬과 같은 것.


 나는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되지 않도록 탐욕을 절제한다. 그렇기에 쌓여 가는 통장 잔고를 경계한다. 미처 사랑하지 못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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