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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아 Nov 08. 2024

우리가 모여 탄생한 별 한가운데에 서 있어


 살면서 위를 바라보지 않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다. 보고 싶지 않아도 선명하게 매겨지는 나의 등급을 직시해야 하는 시기였다. 크게 변한 것 없이 2학년 때 반 그대로 한 학년 올라갔을 뿐인데 곁에 있는 친구들은 어느새 경쟁 상대가 되었다. 모의고사에서 중위권을 맴돌았던 내가 그나마 상위권에 속했던 영역은 내신 점수와 교내 상장 개수였는데, 착실한 야간자율학습 실천과 꾸준한 글쓰기 대회 참가로 강당 단상에 서서 상을 몇 차례 받곤 했다.

 수상 레퍼토리는 뻔했다. 선생님의 부름에 급히 체육복을 벗어 던지고 단정한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 강당 무대의 맨 앞 오른쪽 벽면에 서서 이름이 불릴 때까지 대기한다. 이후 ‘송현아 학생 앞으로!’라는 외침이 들리면 단상의 가운데에 서서 상명을 읊는 음성이 끝날 때까지 양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기다린다. 시상자인 교장 선생님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호명되면 건네주는 상장을 두 손으로 받고, 악수를 한 뒤 뒤로 돌아 묵례를 한다. 내가 서 있는 강단의 밑에서 강제로 시상식의 관중이 된 아이들은 하품이 쩍쩍 나오는 입을 가리지도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박수를 친다. 그 누구도 위에서 내리쬐는 조명을 향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다.


 물론 아주 잠시 둥근 현실의 테두리를 뚫고 뻗어 나가는 기적을 꿈꾸는 때도 있었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뒤 본격적인 입시 준비에 돌입할 즈음이었다. 나는 수능 문제집을 푸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소서 작성과 면접 준비에 전념했다. 시험 점수로만 판단하지 않겠다는 학생부종합전형이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에 발이라도 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의 능력과 위치를 잔인하리만큼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상향 세 개, 적정 두 개, 하향 한 개로 총 여섯 군데에 입시 원서를 넣었다. 합격과 불합격의 거스를 수 없는 간극을 느낀 것도 이맘때였다. 1차 서류 전형 결과를 조회할 때면 강렬한 빨간 글씨에 눈앞이 흐려지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파란 글씨에 학교 앞 벤치에서 친구의 등을 때리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면접 당일에는 고데기로 머리를 단정하게 펴고,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교복의 빨간 넥타이를 조여 맨 뒤 대학교 캠퍼스로 향했다. 다대다 면접장에서 만난 친구들과 개설한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대학생 신분으로 다시 보자며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네 명의 예비 동기들은 그날 이후로 만날 수 없었으며, 2순위, 3순위, 5순위 대학에서도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가을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이제 남은 대학은 단 두 곳. (마침 6순위 대학에 합격했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다) 버리는 카드에 가까웠던 1순위 대학에서 예비 8번을 받는 경사에 기적이 손끝에 닿을 듯싶었지만 끝내 예비는 빠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나는 4순위 대학에 최종 합격을 했다.

 그날 이후로 굳이 위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눈 높은 대학의 면접관들은 학생부 내용보다는 학교 자체의 위상을 본다는 담임 선생님의 조언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의 출신을 굳이 따지자면,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서 뺑뺑이를 돌려 걸린 일반 인문계고 졸업생이기 때문이니까. 제약 없이 직접 고른 대학 입시에서조차도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한 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과거이자 현실이니까.


 10: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학교의 개강 첫날에 든 생각은 ‘자퇴해야 하나?’였다. 한껏 긴장한 채 들어선 첫 수업의 오리엔테이션은 꺼낸 공책과 펜이 민망할 정도로 허공을 바라보다 끝났으며, 교수님과 단둘이 남을 새라 일사분란하게 빠져나가는 학생들 틈으로 허겁지겁 나와서 든 생각은 ‘이제 뭐 하지?’였다. 분명 등교 전날 뜬눈으로 유튜브에서 본 대학 생활은 이러지 않았는데. 비싼 등록금까지 내고 대학생이 되었지만 시작, 젊음, 활력과 같이 새내기로 점철되는 두근거림을 느낄 수 없었다. 한쪽 팔에는 처음 사귄 친구의 팔을, 동시에 다른 한쪽 팔에는 두꺼운 전공책을 낀 채 걷고 있으면 완전히 따뜻해지지 않은 봄바람에 사르르 흩날려야 할 머리카락조차 만져지지 않았다. 아무렴 입학 직전 충수염에 걸린 탓에 ‘새터’나 ‘MT’라고 불리는 신입생들을 위한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운명의 도돌이표일지도 모르겠다. 타고난 내성적인 성향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에 가는 것뿐이니, 결국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조용한 귀가로 끝난 대학 생활 첫날에 남은 건 회의감과 허무함이었다.

 그래서 정말 자퇴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럴 깡은 없었다. 당장 따로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마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한 한국형 학생이었다. 항상 그래 왔듯이 착실하게 수업을 듣고 과제를 했다. ‘숙제’보다 어감이 어른스러운 ‘과제’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졌다는 것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 빼고는 고등학교 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개강 파티, 동기 MT와 같은 학과 행사에 참여하면서 동기들과 안면을 트기도 했지만, 익숙한 ‘친구’의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백이면 백 조별 과제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같이 밥을 먹게 된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로 정의되곤 했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던가. 학연을 쌓을 수 없다면 평균 학점 3.5라도 넘겨서 졸업하자는 다짐에 학교, 집,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어느 가을, 중위권 인생의 기조를 바꾼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른바 성생활. 다소 문란하게 보인다면 유감이지만, ‘성공한 생활을 할 친구들’의 줄임말이다. 성생활은 2015년 교내 워크숍 행사를 같이 준비하면서 만들어진 그룹으로, 다섯 명이 모임을 지속해 오다가 2019년에 한 명을 추가 영입했다. 구성원은 송씨인 나를 포함한 강씨, 김씨, 권씨, 신씨, 정씨로, 생물학적 성(性)은 같지만 공교롭게 이름의 성(姓)과 성격이 제각기 다른 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강씨 : 이가네 첫째 딸. 아래로 한 명의 남동생이 있다. 동글동글하고 짧은 머리와 차분하지만 똑 부러진 말투로 첫 만남에 내 관심을 사로잡은 여자. 삶을 재단하고 정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함께 잘 견디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김씨 : 권가네 첫째 딸. 아래로 두 명의 여동생이 있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잊지 않고 선물 꾸러미를 주는 섬세한 여자. 낭만을 현실로 만드는 추진력이 있다. 새로운 경험을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의 방랑자. 철두철미하지만 조용히 틈을 주는 여유와 귀여움이 있다. 함께 떠나고 싶은 사람.


권씨 : 가가네 둘째 딸. 위로 한 명의 오빠가 있다. 현란한 말솜씨와 드립 능력(성생활 작명자), 실감 나는 이야기 구연으로 모두를 웃게 해 주는 여자. 단 일 초도 오디오가 비지 않는 입담을 가지고 있다. 같이 있는 공간이 사랑으로 가득 차는 사람.


신씨 : 김가네 둘째 딸. 위로 한 명의 언니가 있다. 더 큰 대한민국을 기다리기보다 더 큰 나라로 떠날 것을 택한 용기 있는 여자. 겉보기와 다르게 터프하고 진중한 반전 매력을 가지고 있다. 묵묵히 위로해 주는 영화와 문학 같은 사람.


정씨 : 신가네 둘째 딸. 위로 한 명의 오빠가 있다. 베푸는 것에 주저하지 않으며 넓은 포용력을 지닌 태평양 같은 여자. 굳이 본인의 존재를 내세우려고 하지 않아도 일을 처리할 때 돋보이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한없이 편안하고 든든한 사람.


 나에게 너희는 여자로 잘 살기 위해 모인 이 시대의 딸들이다. 첫째 딸과 막내딸의 고충을 개인적인 가정사로 치부하지 않고, 넓은 세상사로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밝다. 본인의 출생 과정이 자연 분만인지 제왕 절개인지 명확히 알고, 출산이 여성의 몸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세세하게 따져 보는 우리의 사고는 깊다. 부모의 이혼을 고백할 때 안타까운 이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홀로 서는 여성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의 연대는 섬세하다. 비혼 선언에 이유를 묻지 않으며, 새로운 가족 형태의 필요성을 논하는 우리의 사랑은 다양하다.


 성생활의 인연은 1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호주로 워홀을 떠났다가 잠시 한국에 들어온 신씨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이번 자리의 주인공인 신씨는 호주의 한 간호대 진학을 앞두고 있으며, 강씨는 법학 공부에 매진하던 도중 전세 사기에 당하는 역경을 이겨 내고 또 다른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IT 회사에 다니는 권씨는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제2의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 있으며, 대외 활동을 꾸준히 했던 정씨는 마케팅 회사의 인재로 활약하고 있다. 방송 작가인 김씨는 밤샘 근무와 소재 찾기에 골머리를 앓다가도 세계 여행지를 물색하고 있으며, 가장 먼저 직장 생활을 시작해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한 나는 글을 쓰며 내내 묵혀 두었던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얘들아, 너희를 보며 깨달은 게 있어. 동시대를 기록하는 삶일지라도 시시각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아등바등했던 마음이 좀 후련해지더라. 그동안 나는 기득권에 반발하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그들이 마땅히 옳다고 여기는 등급에 스스로를 맞추고 있었어. 현실이 고달프다는 이유로 순응했던 거지. 지금 당장은 행동하지 않고 침묵하는 게 안전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이제 그러지 않으려고. 적어도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단정하는 슬픈 자학은 하지 않으려고. 너희와 있으면서 때로는 위를, 때로는 아래를, 때로는 옆을 향해 어느 방위로든 고개를 젖힐 수 있는 용기를 얻었거든. 다섯 개의 꼭짓점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기적을 마주한 나는 우리가 모여 탄생한 별의 한가운데에 서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너희가 어디에 있든 나 또한 옆에 있을 거야. 곧 보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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