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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아 Nov 15. 2024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작은별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볼게. 18년 전의 일이야. 혹시 기억나?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리면 흐릿했던 장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거야. 그것도 가장 가까이 눈앞에 있는 사람과 함께. 그게 누구일지 궁금하지 않아? 아, 입꼬리가 너무 올라갔다. 괜히 내가 더 설레는 거 있지. 호기심 유발은 이쯤에서 끝내고,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숫자 셋을 세는 타이밍에 맞춰 눈을 감으면 시선을 과거로 옮길 수 있어. 아, 하나 당부할 게 있는데, 이때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지렁이가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것처럼 몸속 혈관들이 울렁일 거야. 그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절대 먼저 눈을 떠서도 안 되고. 시간 여행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거든. 그럼 이제 진짜 시작한다. 자, 준비됐지? 숨 한번 들이마시고 외칠게. 하나, 둘, 셋!


 하아, 하, 하아… 다들 잘 도착했어? 아마 가슴이 엄청 가쁠 거야. 과거로 오는 동안 숨을 쉴 수 없게 되어 있거든. 아직은 눈을 뜨면 안 돼.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지고 정상적인 속도를 찾게 되면, 캄캄한 어둠 사이로 별의 꼬리처럼 긴 한 줄기 빛이 보일 거야. 그게 바로 과거로 옮기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지. 다들 어느 정도 호흡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으니까 다음 단계로 넘어갈게. 이번에는 내가 숫자 셋을 세면 하얀 빛줄기를 따라 눈을 크게 떠 보는 거야. 눈을 뜨는 순간 더 이상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돼. 그렇다고 너무 불안해하지는 마.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빛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가야겠다. 과거로부터 시작된 인연이 널 기다리고 있어. 자, 셋을 세면 눈을 뜨는 거야. 우리는 꼭 다시 만나자. 하나, 둘, 셋!


 다들 잘 도착했지? 눈앞에 있는 인연이 낯설 수도, 별로 달갑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너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건 틀림없어. 너무 끔찍해서 그 존재를 지우고 싶을 정도라면 더 악착같이 마주해 봐. 그건 나의 결핍과 상처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익숙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인연과의 추억에서조차 묻어 두고 싶은 기억이 있기 마련이거든.


 이제 내 얘기를 해 볼게. 난 앞머리 없이 하나로 묶은 머리 사이로 곱슬곱슬한 잔머리가 삐죽 나오고, 펑퍼짐한 카키색 긴 바지에 탁한 분홍색 잠바를 입은 한 아이를 만났어. 당시의 나보다 키도 훨씬 컸었지. 키 순서대로 자리를 정할 때면 그 아이는 항상 뒤에 있었거든. 새까맣고 긴 머리에 피부가 하얀 우리 반 반장이랑 친해 보였어. 사실 나는 반장이 조금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었는데, 미래에서는 반갑게 웃으면서 인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와 그 아이를 연결해 준 은인이거든.

 책상 위 교과서에 적혀 있는 글씨가 보여. 역곡초등학교 4학년 3반. 그 아이는 글씨가 참 어른스러웠어.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성격도 조용하면서 점잖았지. 그래서 더 관심이 갔던 것 같아. 하지만 소심하고 내향적이었던 나는 따로 말을 걸지 못했어. 그렇게 조용히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 아, 하나 깜빡하고 말 못 한 게 있는데, 과거의 시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 우리가 원하는 때로. 아마 지금쯤 다들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을 거야. 그렇지?

 나는 그 아이와 남은 초등학교 생활을 쭉 함께했어. 운 좋게 같은 반이 되었거든. 비밀스러운 걸 좋아했던 나는 그 아이와 비밀일기를 주고받았어. 분량은 두 권 정도인데, 한 권은 자물쇠도 달려 있었어. 어느 날은 같은 반 애들이 일기를 훔쳐 가서 본 일도 있었어. 우리는 보지 말라는 저항밖에 할 수 없었지.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걔네가 바로 그 장난꾸러기들이었거든. 일기에는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한 글도 있었는데, 그걸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어. 평생 몰래 간직하고 싶었거든. 그 후로 일기에 등장하는 모든 주어는 우리 둘뿐이었어.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사내놈들이 어린 순정으로 남을 기회를 앗아간 거지. 뭐,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긴 하지만 일찍 각성한 우리의 이야깃거리에서 남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었어.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낭비하는 게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지. 더욱이 지금은 주변에 있는 여자들을 사랑하기에 급급한 삶을 살고 있거든.

 시선을 옆으로 돌려 볼게. 옥상이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아파트가 하나 보여. 작고 좁은 거실 옆에 미닫이문으로 된 작은 방이 하나 있어. 오른쪽 벽면에 갈색 나무 책장과 책상이 한데 엮여 있고, 바로 맞은편에 이층 침대가 놓여 있어. 한 살 터울인 남동생이랑 방을 같이 썼거든. 그리고 엄마랑 아빠가 같이 쓰는 큰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벽면을 가득 채우는 초록색 옷장과 침대, 텔레비전이 있어. 나와 그 아이는 종종 우리 집을 아지트 삼아서 놀곤 했지. 우리 부모님은 집에 없는 시간이 더 많았거든.

 아, 신기한 거 하나 알려 줄까? 다들 이미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한 시공간에 깊이 빠져들면 당시에 존재했던 냄새도 똑같이 맡을 수 있어. 나는 옛날 우리 집에서 아빠의 냄새를 맡았는데, 묘사하자면 담배 연기로 뒤덮인 옷가지와 남성 호르몬이 뿜어내는 묘하게 쿰쿰한 향이야. 종종 집안에 들어섰을 때 콧속을 예민하게 파고드는 냄새로 아빠의 존재를 알아차리곤 했는데, 아뿔싸! 마침 평소와 같이 그 아이를 우리 집에 데리고 온 날 아빠의 냄새를 맡았지, 뭐야? 그날은 아빠가 들으면 안 될 중대한 비밀을 밝히려고 한 날이었거든. 조심히 큰 방으로 들어가서 보니 아빠는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어. 아빠는 한번 잠들면 쉽게 깨지 않는 편이라 현관문 앞 거실 바닥에 걸터앉아서 그 아이에게 전할 속 얘기를 꺼냈지. 엄마랑 아빠가 따로 살게 되어서 내가 엄마 따라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갈 수도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인생은 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 부모님의 이혼 후 나와 동생은 아빠랑 같이 살게 되었어.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아빠가 그날의 비밀을 들었던 것 같더라고.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로 양육자가 바뀌긴 했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다른 동네로 이사 갈 필요 없이 그 아이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어. 당시 주고받았던 편지에는 ‘네가 전학을 갈까 봐 무서웠어’라며 그날을 회상하는 일기가 적혀 있었지. 그 아이 눈에는 단지 내가 이사 가지 않기만을 바랐던 거야, 부모의 이혼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참 순수하고 애틋해서 웃음이 나. 모든 것이 그 아이의 바람대로 된 것만 같아서. 그렇다고 믿고 있어서.

 우리는 무려 초중고를 전부 같은 학교에서 다녔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는 내가 그 아이보다 키가 커졌지. 나도 평균 키에 크게 못 미치긴 하는데, 그 아이는 조그맣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어. 이제부터 그 아이를 작은별이라고 부를 거야. 내가 지은 애칭인데, 참 귀엽지?

 사실 작은별이라고 지은 이유는 따로 있어. 작아 보여도 가까이 갈수록 거대해지는 하늘 위 별이 꼭 그 아이를 닮았거든. 작은별은 나보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어. 친구를 바라보는 눈도 달랐지. 초등학교 5학년 때 잠깐 다른 여자아이와 함께 셋이 친했을 때가 있었는데, 나는 그 여자아이가 싫고 미웠어. 나를 알게 모르게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 일종의 열등감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도 당시에는 몰랐던 거지. 그 마음을 작은별한테 고백했었는데, 작은별은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나약한 마음을 먹은 나를 나무라지도, 달래지도 않았지. 그 후로 사람을 별다른 이유 없이 질투하고 미워하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어. 그 불안정한 내면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혜도 생기게 됐지.

 작은별은 어렸을 때 늘 나보다 더 빨랐던 것 같아. 같이 즐겨 했던 달리기 게임에서도 내가 양말을 신을 때 작은별은 운동화를 신었어. 작은별이 없었다면 내 인생에는 게임이라는 소소한 재미도 없었을 거야. 우리의 관심사가 달리기 게임에서 학업, 사랑, 취업, 독립으로 변하게 되면서 서로에게만 말할 수 있는 비밀도 더욱 많아졌지. 어느새 우리의 인생사를 비밀일기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커 버렸어. 같이 졸업한 모교 주변의 산책로를 걷거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허공에 수놓아지곤 해. 언젠가는 세상에 닿길 바라면서.


 한때는 밤이 오면 또 밤이 오는 세계를 꿈꾸곤 했어. 하지만 태어난 이상 아침도 꼭 맞이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지. 시선이 자꾸만 앞으로 향하는 것도 같은 이치야. 이제 현재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된 것처럼. 다들 어떤 인연을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 나와 마주했길 바라. 그리고 언제든지 시선을 돌려서 과거의 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18년 전의 너와 나는 한없이 어렸을 뿐이니까. 단지 모르는 게 많았을 뿐이니까.


 어른이 된 지금의 우리는 세상에 직면하자 보이게 된 것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어. 과거는 알 수 없는 미래로 흘러갔지만, 현재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로 흘러갈 거야. 자, 이제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야. 내 목소리 들리지? 눈을 감고 있다가 내가 숫자 셋을 세면 또 환하게 뜨면 돼. 별의 꼬리를 잇는 행성의 중심을 향해서.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만나자.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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