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현아 Nov 22. 2024

어린 회고록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예고편 영상을 봤다. 실제 이혼 전문 변호사 각본의 이혼 법정 드라마였다. 본편에서는 현실보다 덜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배우자의 외도 또는 가정 폭력으로 인한 이혼 소송 사례들이 즐비했다. 합의 이혼에서 끝낼 것인지, 감정싸움과 머리싸움으로 뒤얽힌 소송까지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부터 재고 따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현실은 늦게 돌아볼수록 가까이 있는 법이다. 엄마랑 아빠도 그랬을까. 양육권 분쟁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재산을 분할하는 기준은 뭐였을까. 얼핏 들은 이혼 용어들을 나열하며 생각했다. 우리 가족이 찢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갈등 때문이라고. 어렴풋이 알 수밖에 없는 건 체내화된 감각으로 느끼는 집안 분위기다.


 우리 집은 이 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나와 동생은 사춘기를 겪기 전까지 방을 같이 썼다. 내가 기억하는 한 대부분 방이 두 개인 집에서 네 가족이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단독 주택인 외할머니 집의 지하 단칸방에서 살 때에는 장마철이 되면 홍수가 나서 온 집안이 흙탕물로 뒤덮였다. 강아지를 키우는 집주인의 주택 옆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작은 이 층 집에서 살 때에는 대문을 열기만 하면 짖는 강아지가 무서워 들어가지 못하고, 엄마나 아빠가 올 때까지 주변을 서성였다.

 집안에 세월의 흔적이 묻었다 싶으면 귀신같이 엄마에게 가서 도대체 언제 이사 가냐며 치근댔다. 침대에 누워 여름철 습기로 가득 핀 방구석의 곰팡이가 언제쯤 사라질지 지켜보기도 했다. 얼룩진 검은 자국은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건조한 겨울이 와도 사라지지 않았다. 꽃이 피는 따뜻한 봄이 오면 거처를 옮길 테니 괜찮았다. 정돈되지 않은 집에 친구들이 와도 부끄럽지 않았다. 어릴 적의 나는 가난을 모를 만큼 가난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엄마, 혈당 공복을 낮추기 위해서는 체중 조절이 필수적이래. 이건 내가 아니라 엄마를 위한 거야.”


 오늘도 어김없이 귀찮아하는 엄마의 손을 붙잡고 나섰다. 집안 내력으로 건강검진 결과에 빠지지 않고 낙인찍히는 당뇨 위험군 표시에 대적해야 했다. 일정한 휴무 없이 늦게까지 일하는 엄마가 짬을 내서 할 수 있는 운동은 딸의 손에 이끌려서 하는 달밤의 산책뿐이었다.

 왕복 한 시간 남짓한 산책길에서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건 함께 걷고 있는 네 다리와 두 입이다. 서로의 속도에 맞춰 진솔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소재들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는, 자질구레하게 박혀 지울 수 없는 사건과 같은 것들. 엄마는 본격적으로 속에 묵혀 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번듯한 아파트를 팔게 된 이야기부터 직장에 와서 돈을 요구하는 전 남편의 모습까지. 아빠한테 데인 게 많은 듯했다. 엄마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문득 열심히 살겠다는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는 몇 개월 주기로 같이 저녁을 먹을 때마다 맞은편에 앉은 나와 동생을 번갈아 보며 착하게 커 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미세하게 열린 입 안의 검은 동굴 사이로 씨앗 없는 원망을 심는다.


 아빠, 이럴 거면 도대체 왜 그랬어. 그리고 엄마는 그걸 나한테 왜 말하는 거야? 난 아빠를 같이 욕해 줄 수 없는데. 지금도 아빠를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데. 엄마는 아빠를 안 보면 그만이지만 나는 또 봐야 하는데. 그럼 더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되잖아. 아빠의 귀책사유가 부녀의 연까지 끊을 수는 없으니까. 그냥 다 지나간 일 엄마 가슴속에만 묻어 두면 안 될까. 아니야. 스물다섯에 애 둘 낳고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어, 엄마. 엄마 노후는 내가 책임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그런데 아빠는 어쩌지. 사실 내 밥벌이할 돈도 없는데. 내 사주에는 금이 하나도 없대. 돈 많이 벌 팔자는 아닌가 봐. 둘을 감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러게 왜 헤어졌어. 아니지. 엄마 얘기 들어 보니까 잘 헤어진 것 같아. 엄마도 엄마 인생 살아야지. 남자랑 자식 때문에 계속 희생할 수는 없잖아. 그럼 나도 내 인생만 보면서 살게 해 주면 안 될까. 나 아직 이십 대잖아. 이제는 좀 덜 크고 싶어서 그래.




  가만히 앉아 흰 벽을 바라본다. 회색에 가까운 검은 비행 물체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여러 개의 분신이 생긴다. 인간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몸을 일으켜 현관문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일반 쓰레기봉투 속 으스러진 계란 껍데기가 보인다. 봉투의 입구를 잡고 흔들자 안에 기생하고 있던 초파리 떼가 위로 솟구친다. 쓰레기 세계에서 유일한 천연물인 계란 껍데기를 유심히 관찰한다. 굳은 흰색 점막의 표면에는 아직 부화하지 못한 초파리의 알들이 붙어 있을 것이다. 아무런 생명도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여긴 척박한 곳에서조차 생물이 탄생하고 있었다. 나의 씨앗 없는 원망이 싹을 틔운 것처럼.


 나는 어른이 되기 위한 어린 회고록을 쓴다. 왜곡된 감정의 진심에서 발화한 원망은 소리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당신의 심장을 움켜쥐고 눈물을 훔칠 것이다. 일순간 고통스러울지라도 투명한 물은 생명수가 되고, 싹은 곧 무성한 나무로 자라게 될 것이다. 태양의 빛을 본 어두운 원망은 소멸하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나는 위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어떻게든 지금껏 나를 살게 해 준 당신도 그럴 것이다.

이전 18화 보름달의 자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