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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아 Dec 02. 2024

엄마와의 이별(2)

엄마와 나를 분리하는 연습

 천륜으로 이어진 엄마는 나에게 겨울이 오면 본인의 팔을 꺾어 불을 때 주고, 여름이 오면 울창한 나뭇잎으로 바람을 쐬어 주며, 봄과 가을이 오면 따스한 햇볕을 쬘 수 있도록 멀리서 지켜봐 주는 굳건한 나무와 같다. 나무 밑 세상은 아롱아롱 맺힌 열매를 초록으로 물든 들판에 똑 떼어다 놓은 것처럼 조화롭고 평화로웠다. 열매는 너무나도 작고 소중해서 계절의 변화로 생기는 표피의 간지러움조차 고통이 될 것만 같았다. 꽃이 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24번째 겨울의 나는, 그런 열매를 보며 불현듯 생긴 엄마와의 균열 속으로 쏙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기의 온도로 알아채는 세월의 흐름은 성장통일 뿐, 진정한 고통은 그의 곁에서 짙게 드리워진 엄마의 시린 그늘이었으니까.


 당시 다니던 직장의 계약 만료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백수가 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전세 계약서에 이름을 적었다. 싱글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빈 곳에 빨래 건조대가 들어서면 앉을 자리 없이 빼곡히 차는 4평 남짓한 원룸이었다. 외풍이 심해 패딩을 입어도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장판 위 발가락 끝은 신경이 죽은 듯 퍼렇게 물들어 갔다. 오래 공실이었던 곳이라 보일러를 틀어도 따뜻해지지 않아 극악무도하게 청구될 가스비가 무서워 다시 보일러 전원 버튼을 눌렀다. 결국 열 발짝이 채 안 되는 현관문 앞으로 갈 때도 상체를 구부린 채 발꿈치를 들어 종종걸음으로 빈집을 터는 도둑 행세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두렵지 않았다. 애매하고 모호하게 따뜻할 바에 얼어 죽어 보자는 결심은 추운 겨울에 홀로 잠을 청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촛불 꺼진 오두막처럼 어둡고 고요한 공간이 네 사람이 북적이는 집보다 안락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냉장고의 작동 소음마저 날카로운 신경을 비껴가는 클래식 선율 같았다.




“엄마 남자 복 진짜 없다.”

“진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어.”

“그런데 나더러 결혼하라는 소리가 나와?”

“결혼은 안 하더라도 연애 몇 번은 해 봐야 할 거 아니야.”

“그놈이 그놈이라며. 엄마 말 지금 완전 모순덩어리인 거 알지?”


 내가 독립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엄마는 그와 헤어졌다. 그 사이 동생도 독립해 어느덧 우리 세 가족은 모두 1인 가구가 되었다. 그와의 이별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알고 싶었지만 엄마의 아픔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내심 기뻤지만, 마음의 방패가 친 외면의 부작용으로 불안 증세가 심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자 있을 엄마의 안위가 걱정됐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교제하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살해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것도 사치일 만큼 교제 전, 교제 중, 교제 후, 시기조차 종잡을 수 없다. 엄마 집 근처에 거주하는 동생에게 엄마의 이별을 알리며, 이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약을 챙겨 먹어야 할 엄마를 신경 쓰라고 일러두었다. 일순간 동생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드는 내가 지긋지긋해서 진절머리가 났다. 심장에 추를 매달아 놓은 듯이 조여 오는 의무감으로 찾아간 엄마의 손을 잡고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의 그늘을 드리우는 건, 엄마가 아닌 나일지도 모른다고.


 엄마와 나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 늦게 다니지 말고 문단속 잘하라는 인사를 말버릇처럼 한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끝으로 서로를 안심시키며 헤어져도 일평생을 잠식한 불안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독립한 자식 반찬 하나 싸 주겠답시고 야채를 다듬는 엄마를 볼 때면, 지천명을 넘긴 얼굴에서 어느덧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려 쉽게 돌아가는 발걸음을 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씩 엄마에게서 떠나는 연습을 한다. 독립적인 개인과 개인을 뭉개 놓아 굳은 교착을 벗어나야만 하기에.


 점점 낮아지는 엄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서로의 그늘에서 삶을 안위한다면 나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엄마의 삶을 살지 못하듯이 엄마도 나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제는 감히 엄마와 나 사이의 선을 넘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 엄마가 주도하는 삶에 대한 결정도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될 것이다. 균형을 이루는 추처럼 어느 한쪽이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엄마와 나를 모녀가 아닌 다른 관계로 정의한다면, 그저 때때로 혼자 먹는 밥맛이 살지 않거나 서로의 얼굴이 그리워질 때쯤 찾는 친밀하고 친근한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공백의 시간 동안 생긴 각자의 에피소드를 털어놓는 순간, 어색하고 삭막해질 법한 한탄도 공중에 떠도는 작은 먼지가 되어 서로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뱃속에 나를 가졌을 때 낮은 돌담길 위로 우뚝 솟은 나무에 맺힌 작은 열매가 유달리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엄마는 갓 태어난 아이를 명명하기 위해 시아버지와 함께 찾아간 작명소에서 태몽과 일맥상통하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옥돌 현(玹)’과 ‘으뜸 아(亞)’가 합쳐진 ’현아‘로, 뜻을 풀이하면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거창한 이름의 뜻과 달리, 겉으로 보기에 어디를 가든 존재감이 있을 리 만무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고개 들어 생각하는 건 내재한 반짝임이 소리 없이 빛을 내고 있다는 상상이다. 나무의 그늘을 벗어나 상상이 현실로 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열매는 홀로 더 빛날 것이다.


 꽃바람이 달큼하게 불어오는, 늦지 않은 봄에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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