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10년 넘게 다닌 직장이 문을 닫았다. 당시 이직한 회사에서 하루하루 퇴사 욕구를 간신히 참고 있던 나로서는 엄마의 인내와 성실이 경이로웠다. (실제로 2년 채우기까지 단 두 달을 남기고 퇴사했다) 직장 생활 도합 4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얻은 것은 용광로에 빠진 것처럼 피부 표면이 수포로 뒤덮이는 염증이었고, 유발 배후에는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이 있었다. 무려 30년 가까이 쉬지 않고 일한 엄마는 악마가 도사리는 청춘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나는 그저 나뭇가지 끝에 아슬히 달린 초록색 이파리에 몸을 숨기다가, 거센 바람이 불 때면 바람결에 따라 하늘을 유영한 뒤 죽음을 마주하는 하루살이처럼 살고 있다. 반면에 엄마는 아기 새의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미 새처럼 살아왔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해서 두 남매를 낳았고, 삼십 대 중반에 배우자와 헤어진 뒤 한부모가족이 되어 두 남매를 홀로 양육했다. 구토가 나올 정도의 극심한 편두통이 골머리를 썩일 때도 일을 쉬지 못했다. 밥을 거르고 잠시 눈을 붙이고 있다가 다시 일터로 나갔다. 먹잇감이 있는 곳이라면 지체 없이 날아다녀야 했다. 역풍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갈라야 했다.
엄마는 쉬는 법을 모른다. 그 말인즉슨 혼자 노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엄마에게는 그렇다 할 취미도 없다. 집 근처 행정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문화 수업을 등록하라고 하면 아줌마들밖에 없어서 싫다는 핑계를 댔다. 전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던 서예라도 배워 보라고 하면 이 나이에 해 봤자 뭐 하냐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렵게 딴 운전면허 묵혀 두면 뭐 하냐고, 집 대출 이자도 다 갚았고 자식한테 들어가는 돈도 없으니 중고차 하나 사서 멀리 떠나라고 하면 겁이 나서 못 하겠다는 볼멘소리를 했다. 발급받은 내일배움카드도 귀찮다는 이유 하나로 유효 기간이 끝난 채 무용지물이 될 게 분명했다.
나와 동생은 이십 대 후반에 각자의 거처를 마련했다. 아무런 뒷바라지 없이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는 절호의 시기에서 혼자 심심해 죽겠다고 하소연하는 엄마가 답답했다. 이제 본인 하나만 챙기면 되는 것이 뭐가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식이 독립해서 가정을 떠나는 순간 공허하고 우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빈 둥지 증후군’의 존재를 알게 된 날에는, 엄마를 기어이 자식마저 떠나 홀로 남은 쓸쓸한 중년 여성이라는 틀 안에 구속하는 현실에 괴로웠다.
빈 둥지 증후군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1.5배에서 2.5배만큼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자녀 양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뻔한 이유 때문이다. 검색창의 스크롤을 내리면 내릴수록 ‘미래에 자식을 떠나보낸다는 상상만 해도 눈물부터 난다’는 맘카페 회원들의 하소연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성 위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파리올림픽이 개최된 2024년에도 수많은 한국 여성이 여전히 경력이 단절된 채 자녀 돌봄과 가사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렇기에 빈 둥지 증후군 역시 지금까지도 여성이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태라면, 구시대적 사회의 통념이 깃든 원인을 파악하는 것에 그치고 싶지 않았다.
‘정신과 전문의가 말하는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전문의인 만큼 실효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줄 거라는 기대감에 엄지손가락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상은 자녀가 독립했을 때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냐는 진행자의 질문으로 시작됐다. 하얗게 센 머리에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남성 전문의는 “나는 매우 속이 시원했지만, 자녀 교육에 힘썼던 아내가 매우 허전해했다”고 말했다. 이내 “독립한 자녀가 아이를 낳았고, 아내가 손주를 보면서 다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허허 웃는 남성을 보며 첫 매듭부터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 둥지 증후군은 또 다른 돌봄 노동을 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나처럼 비출생을 선언한 자녀를 둔 여성은 일평생 빈 둥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왜 같은 자녀를 둔 남성인 본인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외로움과 우울감을 느끼지 않는가? 애초에 돌봄 노동이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사고가 정녕 전문적인 것인가? 똑같이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인 본인은 왜 양육하려 하지 않는가? 돌봄 노동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기 때문인가? 감히 노동의 가치를 차등으로 두어 재단할 수 있는가? 이분법적으로 나뉜 여성과 남성의 노동 형태가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마땅한 답을 내리지 못하는 영상은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었다. 짧은 관절을 움직여 곧장 엑스 창을 눌렀다. 기득권 중에서도 최고층에 있는 ‘남성’이자 ‘의사’인 그는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며 대물림되는 불편함에 무지했다. 왜 엄마는 아빠와 달리 매주 축구를 하러 나가지 못하고, 같이 여행 다녔던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연락이 끊기고, 궁극적으로 혼자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어긋난 매듭을 풀어 처음부터 다시 묶어야 했다.
가장 먼저 한국의 돌봄 노동 실태를 파악했다. 2019년 기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보유한 178만여 명 가운데 실제 요양보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44만 명에 불과하며, 2021년 건강보험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장기 요양 서비스를 제공한 경험이 있는 돌봄 노동자 10명 중 8명은 일을 시작한 지 10년 이내에 현장을 떠난다고 한다.* 이는 한국의 돌봄 노동 시장이 불안정하고, 노동 대비 임금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돌봄 노동자들은 임금체계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저임금을 받는 여성들이 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서울시는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을 묵살하는 ‘외국인 가사 노동자 정책’을 도입했다. 필리핀 출신의 여성 가사 노동자를 고용하는 시범 사업으로,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최저 임금조차 지급하려 하지 않는다. 성별도 모자라 인종까지 차별을 두어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드는 셈이다. 더 값싼 여성 인력으로 사회 문제를 덮으려는 고식지계를 도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의 사회학자 제인 루이스는 “남자가 돌봄에 좀 더 종사하게 될 때까지 돌봄의 가치가 지금보다 높아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돌봄과 양육의 가치를 폄하하며 저출생 문제를 여성의 탓으로 치부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노동 착취만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기는 사회는 결코 인구 절벽에서 감히 발을 딛지 못할 것이다. 여성과 남성을, 그리고 국가를 동일한 돌봄 노동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면 비혼과 비출생이 주류가 될 것이다. 적어도 나를 탄생시킨 한 여성은 평생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2회차 돌봄 노동을 겪지 않을 것이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일개 하루살이인 내가 죽기 전까지 모든 여성이 아무도 남지 않은 빈 둥지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함께 비행하여 조심스러운 날갯짓에 동력을 불어 넣을 것이다. 수컷 짐승에게 물려 날개가 찢긴 새의 얼굴이 익숙하더라도 더 냉정히, 홀로 세상을 날게 할 것이다.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논쟁 하니], 한겨레신문, 2024/04/24
**[인터뷰] “돌봄 노동이 저생산 노동? 저임금이 문제다”, 여성신문, 2024/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