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시골집 앞마당 중 절반을 텃밭으로 사용하는데, 이 시기면파릇파릇한 쪽파를 만날 수 있다. 쪽파는 대파에 비해 다듬는데손이 가지만, 김치 중에 단연 최고봉은 쪽파가 아닐까.
주말이면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한 시간 남짓되는시골에 간다.가는 동안 남편과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한다. 한 주 동안 앞만 보며 달렸다며 푸념을 할 즈음, 남편 머리에는 어느새 쪽파처럼 희끗희끗한 흰머리가보였다.
"우리도 나이가 드나 봐"로 시작한 대화가 어느새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얼른 다른 일을 찾아야지"로 끝이 난다. 직장인이 그렇듯 전문분야에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면 정년까지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다. 더욱이 남편과 내가 하는 일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기에 불안한 마음이 컸다.
시골에 도착하면 부모님은 고령임에도 해야 할 일이 많다. 특히 요즘처럼 봄이 찾아올 무렵에는 밭농사와 논농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튤립 새싹이 땅속 깊은 곳에서 하나 둘 기지개를 켜고,이어서 꽃이 피어날 때쯤, 딱 이 시기부터 시골은 바빠진다.
얼마 전 기계로 곱게 갈아 놓은 텃밭이반듯하게잘 생겼던데, 마침 엄마는 밭에 비료대신 모아놓은 개똥을 잔뜩 뿌렸다며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이곳에 감자를 심는다고 했다. 보관이 어려운 양파보다 감자가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리고선 곁에 있던 쪽파를 한 아름 뽑더니 집에 갈 때 가져가라고 한다. 사실 지금까지 엄마가 주는 쪽파를 해마다 가져왔지만제대로 해먹은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듬기 귀찮기도 하고, 쪽파보다는 대파가 훨씬 요리하는데 편했기 때문이다. 대파는 대충 다듬어서 바로 사용을 하지만 쪽파는 몇 번이나 손이 간다.
작년 이맘때 뿌리째 뽑아 온 쪽파를 그릇에 담아놓고 그대로 방치했더니 잎사귀가 노랗게 변하며 점점 말라갔다. 결국뿌리채로 버려지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으니, 쪽파는 그야말로 우리 집에 오면 산 채로 죽어가는운명이 되었다.
처음 쪽파를 집으로 가져온 날, 열 가닥을 다듬어 계란찜을 했다. 파릇파릇한 색깔이 예쁘기도 했고, 앙증맞은 크기는 아이들에게도 별 거부감이 없었다. 반면 아이들은 대파만 보면 안 먹는다며 파를 야금야금 골라낸다. 쪽파가 잔뜩 들어간 음식은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어떤 날은 별 것 없어 보이는 요리도 쪽파만 있으면 멋진 데코레이션이 된다. 마치 예쁜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시폰에 생크림을 발라서 맛있는 과일로 마무리를 하는 것처럼, 쪽파는 요리의 완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쪽파가 우리 집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한꺼번에 다듬는 게 귀찮아서 요리할 때마다 몇 가닥씩 다듬어 바로 사용했는데, 어쩐지 쪽파 끄트머리에서 노란 빛깔이감돌았다. 순간 내가 선택해야 할 건 피할 수 없는 '다듬기'였다. 귀찮더라도이번만큼은 어떻게든 쪽파를 살려야 했다.아이들이 밥 먹는 시간에 쪽파 봉지를 열었다. 아직까지는 실하게 생긴 것도 있지만, 실오라기처럼 생긴 쪽파도 있었으니, 다듬기도 전에 한숨이 나왔다. 쪽파 머리를 칼로 자른 뒤 상한 입사귀를 잡고 몸통을 아래로 뜯어준다. 흙으로 덮였던 쪽파 몸이 하얗게 변했다. 시간이 갈수록 손톱은 쪽파의 찐득한 진물로 범벅이 되었다. 눈은 점점 맵고 거실은 쪽파의 향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쪽파를 썰어놓은 오징어볶음을 맛있게 먹고 있다.그러면 된 거다.
얼마 전 엄마가 만들어준 쪽파김치 한통이 냉장고에 들어있다. 엄마는 어릴 적 소여 물을 칼로 자르다가 왼쪽 엄지손가락을 잃었다. 한쪽 엄지 손가락이 없이 쪽파를 다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파김치를 아무 생각 없이 먹었는데, 알고 보니 쪽파에서 김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지를 깨달았다. 쪽파가 김치통에 가득 차려면 몇 백개의 파를 다듬어야 할까? 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남은쪽파를 다듬으며 허리는 아프지 눈은 맵지, 모든 일은 쉽게 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하게 하려고만 했던 모든 일들, 한 두 번 해보고 안된다며 포기했던 경험, 힘들다며 중도에 포기했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만큼 모든 면에서 쪽파보다도 못한 사람이었다. 쪽파 다듬는 일도 힘들다고 칭얼대는데 어찌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길 원할까.
망설였던 작은 일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집중하기로 했다. 어떤 일이든 꾸준하게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사람은 누구든 전문가가 된다. 그 시작은 쪽파 다듬기부터다.
한 개, 두 개 모든 쪽파가 다듬어질 때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생애 처음으로 글벗 6인과 함께한 공동 매거진, ' ~하는 마음'의 마지막 글을 발행하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몇 년 전, 글쓰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회가 찾아왔을까요.
글쓰기는 혼자 하는 행위지만, 결국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가 다른 세상을 그려가는 일은 신비한 체험입니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 힘을 받고, 빛이 되어주는 이야기들을 그러 모아 다채로운 색을 칠할 때 내 삶이 이토록 찬란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건 없습니다. 뾰족뾰족 모난 글이지만, 존중하고 공감해 주던 당신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내 삶에 글 쓰기라는 벗이 생겨서 행복합니다.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