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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Jul 21. 2021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즐겨 듣던 노래를 듣는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떨려, 수줍게 넌 내게 고백했지."
내리는 벚꽃 지나 겨울이 올 때까지 언제나 너와 같이 있고 싶어"
아마 비 오던 여름날 밤이었을 거야. 추워 입술이 파랗게 질린 나,
그리고 그대 내 손을 잡으며 입술을 맞추고 떨리던 나를 꼭 안아주던
그대 이제와 솔직히 입맞춤보다 더 떨리던 나를 안아주던 그대의 품이 더 좋았어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에피톤 프로젝트


말수가 없던, 고백이란 걸 모를 것 같던 사람이 내게 고백을 했다.

차갑고 도도해 보이던 사람이 고백이라니! 그 사람 마음에 내가 들어있는 게 신기해서 몇 번이나 허벅지 살을 꼬집어 봤다. 꼬집으니 아팠다.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생각지 않았던, 기대하지 않던 고백이었다. 앞으로 조금 더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만나보자고 한다. 싫지 않았다. 나도 말수가 없는 편이지만 서로가 말이 없다면 불필요한 말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때론 정말 필요한 말보다 그렇지 않은 말을 더 많이 하며 살던 우리였으니까.


우리는 조금씩 만남 횟수를 늘려나갔다. 영화도 보고, 여행도 떠나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갔으며, 만나지 않는 날에는 온종일 전화로 안부를 궁금해했다. 그 사람은 다정했다. 나에 모든 걸 궁금해했고 내가 하는 말에 세심하게 귀 기울여 들어줬다. 엉뚱한 내 이야기에도 손뼉 치며 공감해 주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말주변 없는 내게 말을 잘한단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말을 잘한다고 들어본 적 없는 내게 말을 잘한다니.

생각해보니 나는 그 사람에게만 말을 잘했다. 신기하지. 그 사람 앞에서는 어떠한 말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비가 내렸다.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 예쁜 편지지를 샀다. 유독 비 내리는 날이면 편지지는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편지지에 습한 기온이 종이에 잔뜩 베여 마치 잘 말린 풀잎 향 같았다. 이어서 종이에 펜을 굴리니, ㄱ, ㄷ, ㄷ을 그리자 잉크가 넓게 번졌다. 번짐 가득한 펜으로 그에게 편지를 써 내려갔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몇 번의 비가 내렸고, 이런 날에면 더욱 그리움이 커진다. 정말 이것이 사랑일까? 편지를 읽은 그가 전화를 했다. 비 내리는 날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진짜 사랑이라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나 솔직히 무섭다.
함께한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생각할수록 자꾸만 미안했던 일이 떠올라.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에피톤 프로젝트


비 내릴 때마다 생각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정말 아프다. 마음이 아프면 마음을 추스르면 되겠지만, 이번엔 마음이 아닌 몸이 아프다. 오늘, 내일, 아니 모레면 퇴원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이번엔 몸에 열이 오른다. 38.3도, 38도... 38.5도... 세 시간 전부터 열이 떨어지질 않는다. 염증만 가라앉으면 다 회복되는 줄 알았는데, 지속되는 고열이 말썽이다. 열이 나고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늘 괜찮단다. 참는 게 능사는 아니다. 당신은 두 아이가 있고, 아직은 젊은 나이다.


부모님은 속상한 나머지 연애시절 건강상태도 안 보고 결혼했냐고 한다. 그땐 그랬다. 그냥 좋았으니까, 좋은 감정만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아픈 이후부터 우리 삶은 카세트에 있는 '멈춤'기능처럼 모든 게 정지해버렸다. 직장도, 아이들과의 생활도, 맛있던 저녁식사도, 드라이브를 떠났던 즐거웠던 기억까지 모든 게 정지상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건강했던 그 사람을 떠올리는 일뿐이다.


구석진 곳에 있는 낡은 카세트를 꺼내, 테이프를 넣고 플레이를 누른다. 모든 게 멈춤에서 모든 게 다시 재생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온다.

꼭 건강해져서 집에 돌아가자! 힘내,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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