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지금부터 비디오 찍을 거예요. " 나는 외할머니를 찍기로 했다.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외할머니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다.
"왜 숭한 노인네를 찍어. 예쁜 거를 찍어."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사실 앉아 있는 게 다라 피할 방법도 없었다.
"할머니. 말 좀 해보세요." "말은 무슨 말, 할 말 없어."
"밖에는 봄이 왔어요." "그래? 벌써?"
"꽃도 많이 피었어요." " 꽃이 피었단 말이여?"
외할머니는 할 말이 없는지, 기운이 없는지 내가 한 말에 대답만 할 뿐이었다.
"나는 몰랐지, 방에만 있어서."
외할머니 방에서 보이는 창은 맞은편 건물 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종일 같은 풍경만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알 수 없었다.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해 여름 외할머니는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해 여름 외할머니는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개나리꽃이라도 좀 찍어 보여드릴걸.' 내내 생각했다.
몇 해 지나 어머니 생일날. 선물로 그때 영상을 보여주었다. 화면 속 할머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물었다.
"꽃이 피었단 말이여?"
어머니는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웃는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가끔 소리 내 웃기도 했다. 짧은 영상을 다 본 뒤 어머니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유료 영상이야."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서랍장 속에 내가 선물한 내복이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베지밀은 다 드셨다는 걸 보면 좋아하긴 하셨던 것 같다. 도서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김보통/ 베지밀/ 마지막 선물 / 214~216 p
나이가 들수록 사진으로 내 모습을 남기는 게 두려워진다. 작년보다 쳐진 눈꼬리와 탱탱하지 못한 피부에 불현듯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구나'를 느낀다. 하물며 한참이나 나이가 드신 우리 엄마 심정은 어떨까.
어느 날 엄마가 이야기했다.
"비닐하우스에서 햇볕을 많이 쫴서 그런가. 피부가 지저분해서 거울 보기가 싫네."
도시 사람보다 시골 사람들은 피부가 검은 편이다. 그나마 검은 피부는 낫다. 나이가 들수록 검은 피부는 검버섯과 주름으로 가득 차고 피부는 쳐진다. 같은 또래보다 10년 이상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엄마에게 미안한 건 아이들 옷은 사줘도 엄마에게 새 옷을 언제 사드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들 옷은 계절별로 내복에 바지에 티셔츠를 사주면서 하다못해 엄마에게는 내복 한번 챙겨드린 적 없으니 못난 딸이 틀림없다.
엄마도 김보통 작가 외할머니처럼 베지밀을 좋아한다. 집에는 오래된 김치냉장고가 있는데 그 속에는 베지밀
과 박카스가 잔뜩 들어있다. 친정에 가면 엄마는 가끔씩 시원한 베지밀이나 박카스를 마시라고 건넨다. 어제저녁에는 잠들기 전인데 박카스를 마시라고 주길래 시간이 늦어서 먹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엄마 생각으로는 아이들 육아에 고단함을 박카스로 해결하길 바란 것일 테다. 엄마가 어떤 마음인걸 잘 알면서도 생각 없이 거절한 딸이다. 박카스 한 병을 들고 있던 엄마는 무안한 듯, 곧장 김치냉장고에 박카스 한 병을 도로 집어넣었다.
베지밀은 엄마가 바다 일을 하면서 허기짐을 달래기 위해자주 찾는 음료 중 하나다. 바닷가에서 일을 하다 보면 중간중간 허기가 찾아온다. 강도가 높은 바다 일은 어떤 음료로도 위로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베지밀은 다른 걸 챙겨 먹지 않아도 단 한 개를 마셔도 든든하다. 바다 일을 가기 전 엄마는 베지밀 몇 개를 꼭 챙긴다. 혼자 먹는 게 미안해서일을 함께하는 동네 사람들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情을 나누는 초코파이가 있다면, 더 귀한 정을 나누는 달콤한 맛 베지밀이 있다.
쌀쌀한 1,2월이 지나면 엄마가 살고 있는 시골에도 봄이 찾아온다. 시골은 도시에 비해 일찌감치 봄을 느낄 수 있는데, 다행히도 엄마는 꽃 피는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밭에는 냉이와 달래 나물이 지천이라 냉이무침이 그렇게 맛깔스럽다. 튤립은 초록 새싹을 빼꼼 내밀고, 봄비는 흙냄새를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