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만 원으로 동대문을 가보니

시골 옷가게를 말하다

by 보리똥

전 주인은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옷을 세일로 처분했다.

텅 빈 옷 가게를 모두 채우려면 초기 자본금으로 5백만 원이면 될까?

우선 그녀에게 전달받은 동대문 도매상가를 찾아가는 게 첫 사입의 시작이었다. 남자 친구와 함께 동대문으로 향했다. 동대문은 소매상가(두타, 밀리오레)만 가봤는데 도매상가는 처음 가본 곳이었다. 도매는 소매 옆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소매처럼 쇼핑몰이 따로 있었다.


쇼핑몰은 밤 시장과 낮 시장이 있다. 밤 시장은 저녁시간부터 오픈하고, 낮 시장은 자정부터 오픈한다.

보통 밤 시장 옷은 질 좋은 옷이 많다고 하여 도매 단가가 꽤 나가는 옷이 많았고, 낮 시장은 저렴하지만 밤 시장에 비해 질이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낮 시장에도 얼마든지 단가가 저렴하고 질 좋은 옷들이 많다. 옷에 대한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낮 시장에서 질 좋은 제품을 사입한 뒤 좀 더 많은 마진을 챙길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비록 디자인을 볼 줄 모르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알다시피 나는 옷가게 초보 사장이었다. 사입 가방이 없었더라면 얼굴만 보더라도 '나 소매 구경꾼'이라 쓰여있을 정도니 얼마나 어설펐겠는가. 다행히 내 손에는 커다란 동대문 사입 가방이 있었다. 사입 가방을 메고 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도매상으로 보일 수 있었다. 최대한 소매 티를 벗기 위해 말수를 줄이고 할 말만 했다.

"깔이 어떻게 돼요? 단가는?"

"우선 샘플로 흰색 하나만 할게요."

샘플이라고 했지만, 사실 동네 장사라 같은 디자인 옷이 여러 벌 나갈 리 만무했다. 도시에서는 반응 좋은 옷들은 여러 번 같은 디자인을 사입하곤 했지만, 이놈의 동네는 한번 디스플레이한 옷들은 두 번다시 사입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끼리 시내에서 만나는 날에는 기분 나쁜 이야기가 들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첫 주인이 당부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티셔츠, 블라우스, 바지를 대충 사입했지만 이상하게 메인에 디피를 하려 하니 구색이 갖춰지질 않았다.

대 여섯 벌 정도는 코디가 가능했지만, 나머지 옷들은 스타일이 제각각이었다. 한두 벌 정도 옷이 빠지자 더 이상 함께 코디할 옷이 없었다. 괜한 자신감으로 동네 상권도 생각하지 않고 사입을 한 자신이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는 수없이 다음 날 전 주인이 알려 줬던 상가를 찾아갔다. 액세서리와 잡화가 밀집한 곳 가장 구석진 곳에 옷가게가 덩그러니 있었다. 조금은 통통한, 반곱슬의 중년 사장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반가워요! 옷 가게를 그만둔다더니 새로운 분이 인수하셨군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녀는 말투가 온화했고, 다정했다. 이런 곳에서 옷을 판매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게 당시 나의 첫인상이었다.

"그 동네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잖아요? 보통 **스타일이라 불리는 브랜드 카피 옷들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이건 꾸지 st, 루이 빠 동 st, 셀 랑느 st... 이렇게 코디하면 예쁠 거예요."


굳이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애써 사입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가면 완벽한 풀세트로 사입이 가능했다.

'와! 그녀는 사입 왕인가? 대단하다.'


사입이 끝난 이튿날, 스팀다리미로 열심히 옷을 펴고 코디를 마쳤다. 시루떡을 맞춘 뒤 한 장씩 근처 상인들에게 돌렸다. 오픈식 치고 절반 이상 옷들이 빠졌고, 5백만 원 투자에 2백만 원을 찍었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거라 생각했다. 모두 그녀가 추천해 준 옷 덕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옷 사입이 필요했다. 단골손님 위주로 찾아오는 곳이기 때문에 새로운 옷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들은 구매를 하지 않았다. 돈 2백만 원으로 사입을 가려니 이것저것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운영하는 도매상가를 가고 싶었지만, 단가가 비싸서 몇 벌 사지 못할게 뻔했다. 하는 수없이 자정에 오픈하는 낮 시장을 돌아다녀 단 한 벌이라도 더 사입해야 했다. 낮 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내가 그녀에게 사입한 옷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저렴한 낮 시장에서 질 좋은 옷을 골라 사입한 뒤, 마진을 붙여 판매하는 중간 도매상이었던 것이다. 만약 도매시장에서 만 원짜리 옷을 사입하면 그녀는 15,~2만 원까지 판매단가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그녀가 완벽한 도매상인 줄 알았다.


한 두 벌 더 사자고 돌아다녔지만 남자 친구는 피곤해서 어쩔 줄 몰라했고, 나 역시 돌고 돌아도 사입하고 싶은 마땅한 옷이 눈에 띄지 않았다. 콘셉트도 모르겠고, 어떤 옷이 질 좋은 옷인지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늦은 새벽 그녀를 찾아갔다. 마치 어디선가 한참을 헤매다가 비밀요새를 찾은 사람처럼!

"늦은 시간에 오셨네요! 어떻게 오픈은 잘하셨어요? 피곤할 텐데 커피 한잔 사드릴게요. 드시고 가세요."


그녀는 손님들이 좋아하는 옷을 찾을 줄 아는 안목과 친절함까지 겸비한 지적인 도매상이었다.

그녀를 닮고 싶었다. 나도 언젠가는 좋은 옷을 고르고 손님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는 옷가게 사장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내게 있어 히든카드 같은 존재였다.


달달한 커피가 한 모금만으로 투명한 얼음이 금방 얼굴을 드러냈다.

"새벽에 커피가 생각나면 또 오세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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