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원이 그녀를 위로할 수 있다면

옷으로 마음에 상처를 지운다

by 보리똥

어림잡아 그녀 나이는 60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화장끼 없는 얼굴과 다듬지 않은 곱슬머리, 고무줄 바지에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옷가게를 지날 때 커피 향이 좋아서 찾아온 사람치곤 꾸밈없는 외모였다. 마치 집에서 종이컵에 믹스커피만 좋아할 것 같은 그녀가 커피 향에 이끌려 왔다고 하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녀를 위해 커피를 한 잔 대접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가죽 재질 아이보리 색깔 푹신한 소파에 앉아 가게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워메! 가게를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해 놨어. 그전에 아가씨는 새침하게 생겨서 내가 이 가게를 한 번도 못 와봤는데 이번 참에 첨 들어와 봤네. 아가씨가 인상도 좋고, 우리 딸 같아서 커피 한 잔 얻어먹으려고 왔징."


소파에 앉았던 그녀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쇼윈도에 걸어놓은 남방을 자신이 서있는 방향으로 돌린 후 단추며 옷 재질을 꼼꼼히 살폈다. 특히 색상이 밝거나 화려한 꽃무늬가 들어간 남방류를 좋아했고, 입어볼 수 있냐며 몇 벌의 옷을 지목했다. 옷 대부분은 중년 여성 체형을 고려해 88 사이즈까지도 무난히 맞는 옷이었다. 그러니 88 사이즈 끝자락에 있을 듯한 그녀에게는 맞춤옷인 것처럼 꼭 맞았다.

"왕년에 나는 옷가게 가면 어떤 옷이든 척척 맞았어. 가게 주인도 내가 입어야 주인을 만난 거라며 얼마나 칭찬했는지 몰러. 허허. 이것도 딱 내 옷이네."


그녀는 30분간을 가게에 디피 되어 있는 옷을 입느라 바빴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따뜻했던 커피는 미지근해졌고, 이내 차가워졌다. 차가워진 커피는 커피 향이 약해진다. 그녀가 소파에 앉을 무렵 차가운 커피를 버리고 또다시 따뜻한 커피로 대접했다. 커피는 그녀 입술을 적셨고, 이내 향을 짙게 내뿜었다. 향이 좋은 커피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녀였지만, 커피 맛을 음미하는 그녀 모습에서 나만의 착각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외모와 다르게 커피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 같았다.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싶은데 주변에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어 보였다. 어찌 보면 그녀는 외로운 사람 같아 보였다.


" 아저씨랑 재혼하고 몇 년 전부터 이 동네에 살았는데, 그놈의 딸들은 나를 엄마로 인정하질 않더라고. 얼마 전에도 아빠를 보러 온다고 하더니 나한테 묻지도 않고 아빠만 데리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간거여. 나원참. 누군 딸 없나. 누군 없냐고!"


"이건 비밀인데, 딸들이 떠난 후면 아저씨는 돈 50만 원을 나한테 주지. 딸들에게 구박받는 내가 불쌍해서 그런거여. 뒤늦게 재혼한 게 돈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하는데, 뭘 알지도 못하는 썩을 것들이 그런 소문을 내놔서 내가 이 동네가 지긋지긋 혀!"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는 내게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수다스러운 아줌마처럼 맞장구치며 그러냐고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개인적인 일이고 누가 나쁘고 그렇다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몇 모금 마시고 차가워진 커피를 따뜻한 커피로 바꿔주거나 그녀가 입어보는 옷을 도와주는 일밖에는.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녀에게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입어본 모든 옷을 구매했으면 하는 바람까지 들었으니 더욱 미안한 노릇이었다. 결국 옷 가게도 장사고, 나는 장사꾼인데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도 예쁜 옷 입고 예쁘게 화장하면 길거리에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다 쳐다보더라고. 그래서 우리 아저씨는 옷을 사거나 화장하는 꼴을 못 봐. 혹시라도 내가 다른 남자한테 갈까 봐. 그러니까 옷은 검은 비닐봉투에 싸서 주면돼. 예쁜 봉투 이런거 다 필요없어. 재밌지?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할 줄 알아. 가게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자주 놀러 와서 수다 떨어도 되긋지?"


아무렴요. 해줄 수 있는 건 없어도 이야기를 듣는 건 자신 있었다.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니까! 나는 가끔 힘들고 아픈 일이 있을 때면 남자 친구에게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자상했던 그는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줬고, 나를 만나는 날에는 재미있는 영화나 맛있는 음식점에 데려가 기분을 풀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힘들었던 기억이 싹 사라지고 재 충천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달랐다. 그녀와 살고 있는 아저씨는 술을 좋아했다. 하루가 24시간이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모두 술을 마시거나 취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한 마디로 그녀와 맨 정신으로 대화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그녀를 위로하는 건 가끔 아저씨에게 받는 돈 50만 원이 고작이었다. 돈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옷 가게로 향했다. 입을 수 없는 옷이었지만 그녀에게 꼭 맞는 옷이 아픈 마음을 위로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옷으로 위로받는 사람.


"아까 처음에 입었던 저 남방이랑, 저기 걸려있는 티셔츠랑 감색 바지 내가 사갈 거구먼. 저렇게 하면 월마여?"

"오메! 비싸다 비싸. 3만 원이라도 깎자!"

시골인심이 이래서 좋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전 주인에게 깎을 걸 대비해 옷 값의 일정 부분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옷은 3만 원을 깎아주면 제 값을 받는 것이다.


그녀 주머니에는 지갑 없이 현금 뭉치만 들려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15만 원을 받았다. 커피 세 잔 값에 아침 매출치 고는 꽤 쏠쏠했다. 하지만 씁쓸한 기분이 마음 어디선가 일렁거렸다.

그녀는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옷을 샀고, 나는 그녀 이야기를 들어줬을 뿐인데 돈을 벌었다.

'과연 나는 옷을 판매하기 위해 장사를 시작한 걸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장사를 한 걸까.'


그녀가 다녀 간 오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았다.

나는 또다시 가게문을 열고 나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손님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딱딱딱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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