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머리, 달걀형의 흰 피부, 대략 4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호리호리한 여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보통 이런 느낌의 여성은 걸을 때마다 똑깍똑깍 발자국 소리가 들렸는데, 왠지 그녀 발자국 소리는 다르게 들렸다. 구두를 신었는데도 탁탁탁 둔탁한 소리를 내는 그녀였다. 그녀는 어색한 표정과 자세로 옷 주변을 살폈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옷가게는 대체적으로 큰 사이즈 옷이 많은 편이다. 젊은 여성보다는 5~60대를, 마른 체형보다는 77에서 88 사이즈 체격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보는 옷마다 사이즈가 커 보이는지 그중 제일 작아 보이는 옷을 골랐다.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옷보다 어둡고 심플한 옷을 꺼내 거울로 가져갔다.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퇴근하면서 옷가게 골목을 항상 지나치는데 막상 들어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어떤 날에는 문이 닫혔거나 손님들이 가득하기도 했고 , 대체적으로 할머니들 옷이 많은 것 같았어요. 혹시 그때 그 주인 아가씨 아니죠?"
옷 가게에 단 한 번도 온 적 없는 손님들 대부분은 전주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주인과 나는 생김새나 스타일도 달랐고 가게 분위기도 달랐다. 같은 거래처에서 옷을 사입했지만 손님들은 귀신같이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가게를 열고 닫는 시간이 일정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손님이 없어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같은 시간에 가게문을 열었다, 가게를 시작한 지 몇 달 후 주변 상가 사장들은 '생각보다 장사를 잘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인즉슨, '장사가 잘된다'는 말이 아니라 전 주인에 비해 성실하다는 이야기였다. 퇴근 후 그녀가 옷가게를 찾아오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전주인은 일찌감치 문을 닫고 퇴근을 했었다. 나는 매일 저녁 7시면 퇴근했기 때문에 그녀와 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옷 몇 벌을 두고 고민하던 그녀는 매장 안에 몇 개 되지 않는 검정 스키니 바지를 골랐다. 사실 말이 좋아 스키니지, 쭉쭉 잘 늘어나는 허리가 고무줄로 된 바지였다.
"이런 바지를 입고 재킷 하나 무심하게 걸쳐주면 고무줄 바지인걸 아무도 모를 거예요. 호호"
고무줄 바지를 구매한 게 멋쩍은 듯 너스레를 떠는 내게 그녀는 씽긋 미소를 뗬다.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퇴근하면서 종종 놀러 와도 될까요? 아들이 둘 있고 대학생인데, 이제는 엄마가 집에 돌아와도 대화를 안 해요. 남편은 남편대로 생활이 있어서 점점 저에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아요."
당시 나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반면 나는 그녀와 다르게 가게에서는 억지로라도 손님들과 말을 해야 했고, 오히려 집에서는 말하는 게 귀찮았다. 직업이 서로 다르니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스키니 바지를 검정 봉투에 담아 건넨 후 그녀는 하얀색 가죽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진한 커피보다는 따뜻한 녹차가 어울리는 밤이었다. 검은색 컵을 감싸 쥔 하얀 손이 더욱 가냘파 보였다.
"원래 옷가게를 했었어요? 이렇게 외진 시골에서 장사하면 답답하지 않아요?"
실은 도시에서 옷가게를 할 만큼 넉넉한 자본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갖고 있는 돈이 부족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도시 사람보다 시골사람이 좋다'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는 내게 그녀는 다시 한번 미소를 보였다. 두 번째 귀여운 미소다.
이곳은 포도 과수원을 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녀도 포도 농사를 짓던 부모님 곁에서 자랐다.
파란색 작은 포도열매가 탱글탱글한 보라색 포도가 되기까지 농사꾼의 땀은 하루도 마를 날이 없었다. 그렇게 포도는 농사꾼의 땀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열매였다. 부모님 포도가 얼마나 맛있는지부터 시작해 그녀만의 남다른 포도사랑은 멈출 줄 몰랐다. 하얀 피부에 커트머리, 단정한 구두 소리와는 다르게 그녀는 구수하고 달콤한 미스 포도녀였다.
포도 하나로 그녀와 나의 대화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 끊일 줄 몰랐다.
순간 동글동글, 달짝지근한 포도 냄새가 옷가게에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 매출은 단 돈 10만 원. 교통비와 손님들 커피 대접, 점심값을 생각하면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 내 얼굴에도 그녀처럼 귀여운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