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봐도 평균 사이즈를 벗어난 60대 여자가 가게를 찾아왔다. 그렇다고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곱게 화장 한 얼굴, 손톱에는 빨간 매니큐어를 칠했고, 입고 있는 옷은 세련돼보였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들 중 아무리 큰 옷을 찾아보려고 해도 그녀에게 맞는 옷은 없었다. 추천해 줄 옷이 없어 망설이는 내게 그녀가 먼저 말했다. "내가 여기 단골이었는데, 그 아가씨는 좋아하는 취향을 잘 알고 있었어. 동대문에 가면 일부러 내 옷을 골라왔지. 앞으로 아가씨도 그럴 수 있나 해서." 내가 웃음을 보이자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렇게 그녀는 처음 내게 찾아왔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체구를 가졌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픈 눈을 가진 그녀였다. 그녀의 가방 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사랑이란 그 말은 못 해도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그녀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한참이나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마치 노래를 끝까지 듣고 싶은 사람처럼 하염없이 말이다.
"내가 나이는 들었지만 이승철 노래를 좋아해요. 죽기 전에 이승철을 한 번 볼 수 있을까 몰라. 아가씨도 이승철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그녀를 위해 가게 안에서 이승철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선곡했다. 휴대폰에서 들렸던 노래와 스피커에서 들리는 음색은 다르게 들려왔다.
비가 주섬주섬 내리는 목요일 오후, 그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조금씩 풀어나갔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남편은 배 농사를 짓는데, 오로지 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우. 젊어서나 나이가 들어서나 가꿀 줄 도 모르고, 매일 꼬질꼬질하게 사는데, 나이가 드니 이젠 그런 사람이 싫어지는 거야. 남편이 돈을 벌면 나는 이렇게 나와서 돈 쓰는 낙으로 사는데, 언젠가 우연히 알게 된 청년이 있었지.
내 나이 60살, 청년 나이 30대. 얼마 전에 청년과 횟집도 가고 차도 마시고, 드라이브도 하고. 그랬던 사람이 어제부터 연락을 안 받더라고."
그녀는 남편이 있었지만 이승철 노래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사랑을 받는 여자이기를 바랐다. 가슴 시리게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었고, 사랑에 아픔을 느끼고 싶어 했다. 청년 이야기를 하는 그녀 모습은 사뭇 진지해 보였고, 볼이 빨갛게 익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 보였다. 그녀는 청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당신을 좋아하는데,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모르겠다는 여인의 절규처럼 들렸다. 이런 순간에 그녀에게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분명 남편이 있는 그녀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청년이 바빠서 연락을 못했을 거예요. 아니,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아니,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노느라 연락을 못했을 수도 있을 거예요. 아니,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잘 수도 있고,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어떤 위로가 지금 상황에 어울릴지 감이 오질 않았다. 한편으로는 찬밥 신세가 된 남편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때는 그들도 청년과 같은 깊은 사랑을 했을 텐데, 그런 시간이 있었을 텐데.
"청년이 내 차를 몰았고, 나는 그 옆에서 바닷길을 함께 가는데, 갑자기 그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어. 풀잎 냄새 같기도 하고,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 좋은 향이 나서 몇 번이나 코를 킁킁거렸지. 청년과 데이트가 끝난 뒤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갔지. 남편은 저녁으로 된장찌개를 해 먹었는지 집안이 온통 된장 냄새로 가득 차 있더라고. 문득 남편 양말에서도 고린내가 나는데, 나는 왜 이리 남편이 싫은지 모르겠어. 아, 이런 사람과 어떻게 한평생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어. 남편은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무엇을 또 샀는지 관심이 없어. 내가 옷과 가방을 사든, 화장품을 잔뜩 사도 잔소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지."
남편과 청년은 정 반대 사람이었다. 초라한 옷을 입고 매일 아침마다 배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 남편과 달리 청년은 뽀얀 얼굴에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무관심했지만 청년은 뚱뚱한 몸매를 가진 그녀라도 예쁘다고 칭찬했다. 그녀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예쁜지 설명해줬다. 설령 그 사실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그녀는 진심이라고 믿고 싶었다.
오랜만에 그녀가 가게에 들렀다. 하얀 RV 차량에서 내리는 그녀. 핑크색 조끼와 긴치마를 입고, 검정 단화를 신고 왔다. 그녀는 다른 날보다 더 뽀얗게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마치 누군가 나 좀 봐달라고 하는 사람처럼 진한 화장이었다. 동대문에 갔다가 그녀가 말한 남색 재킷을 사 왔다. 사실 디자인도 중요했지만, 예뻐 보이는 옷이라도 사이즈가 커지면 생각보다 멋스러워 보이질 않았다. 겨우 고른 게 재킷 하나였다. 몇 개를 샘플로 더 사 오고 싶었으나, 만일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다른 손님에게 판매할 수 없는 옷이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겨우 한 벌만 사 왔으니 그녀 모습에서는 실망한 눈이 역력해 보였다.
"재킷이 내가 생각했던 디자인과 많이 다른 거 같네. 나는 이 부분이 조금 더 샤랄라 했으면 좋겠어. 이거 동대문 가면 교환 가능해?"
사실 동대문에서 교환이란 건 없다. 도매시장은 소매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옷 한 벌을 교환할 만큼 지질한 장사꾼을 원치 않는다. 하나 살 거 열 벌 , 스무 벌 사면 좋아하는 사람이 도매 장사꾼이다. 나는 많이 사야 한 두벌이었으니 지질한 장사꾼 중 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녀는 재킷을 구매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재킷을 걸친 모습이 예뻐 보인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예뻐 보인다고 말해도 내 표정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장사꾼은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때로는 진심인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한다. 그게 장사의 세계니까.
"가게에서 듣는 이승철 노래가 참 좋던데, 노래 좀 틀어줄래. 참! 얼마 전에 청년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20일 에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어. 앞으로 열흘 남았으니까, 만나기 전까지 동대문 가면 예쁜 옷 좀 부탁해. 벌써부터 떨려. 이승철 노래를 몇 백 곡은 들어야 청년을 만날 수 있겠지?"
나는 그녀가 원한대로 이승철 노래를 선곡했다. 작은 옷가게는 이승철 노래로 가득 울려 퍼졌다. 다리를 꼰 채 앉아있는 그녀 모습에서, 늘씬하고 예쁜 아가씨가 설레는 얼굴로 청년을 기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진정한 사랑이란 게 어떤 것인지 헷갈렸지만, 그녀의 잘못된 사랑 또한 사랑이었으리라. 비록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그녀는 진심이라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