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수가 없던, 고백이란 걸 모를 것 같던 사람이 내게 고백을 했다.차갑고 도도해 보이던 사람이 고백이라니! 그 사람 마음에 내가 들어가 있다는 게 신기해서 몇 번이나 허벅지 살을 꼬집어 봤다. 꼬집으니 아팠다.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생각지 않았던, 기대하지 않던 고백이었다. 앞으로 조금 더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만나보자고 한다. 싫지 않았다. 나도 말수가 없는 편이지만 서로가 말이 없다면 불필요한 말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때론 정말 필요한 말보다 그렇지 않은 말을 더 많이 하며 살던 우리였으니까.
우리는 조금씩 만남 횟수를 늘려나갔다. 영화도 보고, 여행도 떠나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갔으며, 만나지 않은 날에는 온종일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그 사람은 다정했다. 나에 모든 걸 궁금해했고 내가 하는 말에 세심하게 귀 기울여 들어줬다. 엉뚱한 내 이야기에도 손뼉 치며 공감해 주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말주변 없는 내게 말을 잘한단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말을 잘한다고 들어본 적 없는 내게 말을 잘한다니. 생각해보니 나는 그 사람에게만 말을 잘했다. 신기하지. 그 사람 앞에서는 어떠한 말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비가 내렸다.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 예쁜 편지지를 샀다. 유독 비 내리는 날이면 편지지는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습한 기온이 종이에 잔뜩 베여 마치 잘 말린 풀잎 냄새 같았다. 이어서 종이에 볼펜을 굴리니 , ㄱ, ㄷ, ㄷ을 그리자 잉크는 넓게 번졌다. 번짐 가득한 펜으로 그에게 편지를 써 내려갔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몇 번의 비가 내렸고, 이런 날이면 더욱 그리움이 커진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편지를 읽은 그가 전화를 했다. 비 내리는 날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게 맞는 거라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비 내리는 날 생각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정말 아프다. 마음이 아프면 마음을 추스르면 되겠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아닌 몸이 아프다. 오늘, 내일, 아니 모레면 퇴원해서 돌아갈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자구 몸에 열이 오른다. 38.3도, 39도, 40도... 세 시간 전부터 열이 떨어지질 않는다. 열이 나고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늘 괜찮단다. 참는 게 능사는 아니다. 당신은 두 아이가 있고 아직은 젊은 나이다. 부모님은 속상한 나머지 연애시절 건강상태도 안 보고 결혼했냐고 한다. 그땐 그랬다. 그냥 좋으니까. 좋은 감정만으로도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아픈 이후부터 우리 삶은 카세트에 있는 멈춤 기능처럼 모든 게 정지해버렸다. 직장도, 아이들과의 생활도, 멋진 저녁식사도 , 드라이브를 즐겼던 행복했던 시간, 모든 게 정지상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건강했던 그 사람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일이다.
오래된 카세트를 꺼내 테이프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모든 게 멈춤에서 다시 재생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온다.
21년 7월 21일, 병원에서 그를 위해 남긴 글(네이버 블로그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