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에는 동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사입했다. 보통 시장에 다녀오는 경우 수면 시간은 고작 2시간 정도.
제시간에 잠을 못 자는 경우 이불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동대문에 다녀 온날은 피곤하기도 하지만 일주 일 중 가장 바쁜 날 이기도 하다. 토끼눈을 한 채로 가게에 출근하는 날은 온몸이 천근만근이다.
사입이 끝나면 옷은 보통 이불을 담는 봉투 크기만 한 게 서 너 개쯤 된다. 그 안에는 여기저기 매장에서 포장해놓은 소포장 봉투가 들어있다. 봉투를 뜯어 헹거에 걸려있는 옷걸이에 하나둘씩 걸어놓는다. 구겨진 옷을 보면 얼른 다림질을 해서 예뻐진 모습으로 '나 신상이에요.'라고 자랑하고 싶어 진다. 스팀다리미 물통에 물을 넣고 끓기를 기다리면 어느새 뽀얀 연기가 보글보글 피어난다. 연기가 옷을 감싸면 주름진 얼굴이 활짝 피어난다. 그늘진 옷에 생기가 돈다. 칙칙한 빨간색 옷이 선명한 색으로 변하자 가게 안도 발그레하다. 오늘따라 전구색 불빛이 더욱 반짝이는 느낌이다. 마지막 대봉투를 열자 형형색색의 스카프들이 줄줄이 손을 내밀었다. 스카프는 옷을 코디할 때 마지막을 장식할 중요한 액세서리다. 찬 바람이 불 때면 손님들은 목을 감싸 줄 스카프를 자주 찾는다. 특히 중년 손님이 많은 우리 가게는 스카프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
다림질이 끝나고 위, 아래에 알맞은 코디를 고민한다. 이 옷이 괜찮을지 저 옷이 괜찮을지 여러 번 매치해 보지만 생각보다 적절한 옷이 없어 보였다. 옷을 사입할 때 코디에 맞는 옷을 선택해야 한 건데 의지보다 충동구매로 이어지길 여러 번. 바지는 몇 벌 되지 않고 티셔츠만 잔뜩 사입한 적도 많았다. 그러니 메인을 장식할 적당한 옷이 몇 벌 되지 않는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 사이 첫 번째 단골손님이 찾아왔다. 내가 그녀를 겨냥한 밋밋한 티셔츠를 구해왔는데 어떻게 알고 자신의 옷을 쏙 찾아냈다. 단가가 좀 나가는 옷이었지만 망설임 없이 현금을 내미는 그녀. 오픈식 치고는 꽤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두 번째 단골손님이 찾아왔다. 그녀는 화려한 무늬가 들어가 있는 남방을 좋아했다. 뱃살이 있어서 넉넉한 사이즈를 좋아했고, 카라에 철심이 고정되어 분위기 있는 여자로 연출이 가능한 옷을 좋아했다.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옷을 골라왔네? 에이, 이대로 다 받을 거 아니지? 2만 원만 깎아줘."
어쩌겠나. 단골에게 인심을 써도 써야지. 흔쾌히 2만 원을 싹둑 잘라줬더니 기분 좋게 나가는 그녀.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좋았지만, 피곤함이 급속도로 몰려왔다. 토끼눈은 충혈되다 못해 움푹 파여 산 송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벌써 커피도 세 잔째다. 피곤이 정도를 지나칠 때는 카페인도 말을 듣지 않는다. 단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쪽잠이라도 자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계속 찾아오는 손님들 덕분에 피곤함을 견뎌야 했다. 이럴 때는 평소 좋아하던 노랫소리도, 손님이 들어오는 또깍또깍 구두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는 열려있지만 온통 내 몸은 자고 싶은 마음이 마음을 지배해 버렸다. 조금 슬펐다. 피곤해서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고 예쁘다고 가식을 떠는 내 모습이 싫었다. 대체 돈이 뭣이라고, 이러려고 장사하려 한 건 아니었는데...
손님이 뜸한 틈을 타서 매출이 얼마 정도 되는지 지폐를 세기 시작했다. 오십, 육십, 칠십, 어? 구십만 원...
조금만 분발하면 백만 원도 찍을 것 같았다. 티셔츠 하나만 팔아도 백만 원 버는 건 시간문제다. 간절함을 눈치챈 또 다른 손님은 늦은 시간 경차를 몰고 가게 앞에 섰다. 단발머리, 고운 피부, 큰 눈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그녀는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 비해 젊은 손님이었다. 단 한 번도 가게를 찾은 적이 없던 그녀.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소리에 심취해 있을 때 갈색 단화를 신은 그녀의 하체를 보니 청바지가 참 잘 어울렸다. 나는 주책맞게 마음속으로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노래가 떠올랐다. 노래 속 가사처럼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있었구나 하며 연신 그녀의 하체를 바라보았다.
"제 바지에 뭐가 묻었나요? 오자마자 바지만 보시길래 물어보는 거예요."
"아, 아뇨. 바지 입은 모습이 참 예뻐서 보는 겁니다. 눈을 뗄 수가 없네요."
"어머? 그래요? 칭찬도 해주셨으니 티셔츠 하나 사갈게요. 저는 몸이 마른 편이라 큰 사이즈 옷은 잘 입지 않는데, 이번 참에 한 번 도전해 볼게요."
그녀가 떠난 후 오늘 매출은 바람대로 백만 원을 돌파했다. 야호! 지금까지 장사하면서 처음으로 달성한 매출이었다. 기쁜 마음에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이렇게 장사가 잘 된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아빠, 드디어 오늘 백만 원 찍었어. 집에 갈 때 맛있는 거 사갈게."
마침 오늘이 오일장이었고, 시장에 가서 엄마가 좋아하는 즉석 어묵과 핫바, 김, 사과, 순대를 샀다. 사과 만원 어치가 비닐봉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두둑했다. 방금 만든 핫바는 기름 냄새가 고소했다. 오늘은 점심도 먹지도 못하고 장사를 해서인지 뱃속에서는 배고프다고 야단이 났다.
집에 돌아가는 길, 마침 차 안에서는 가수 변진섭에 '희망사항'이 울려 퍼졌고, 배가 고파서 핫바를 한 입 깨물었다. 예상대로 핫바는 쫄깃했고, 담백한 맛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니.'
나는 그녀처럼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날씬한 여자는 아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김치볶음밥을 잘 만들었고, 껌을 씹어도 소리가 안나는 여자였다. 랄랄랄라 라라라, 랄라랄라 라라 라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