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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Oct 29. 2022

손 편지는 사랑을 싣고

손 편지를 써보세요

사각사각, 볼펜심이 종이에 닿으며 노래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동글동글 귀엽게 쓴 글씨, 삐뚤빼뚤 모난 것처럼 쓰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고운 편지지에 어떤 서체로 쓰던 빛나 보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 아니 많게는 다섯 번은 편지를 썼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야말로 낭만적이었다. 어떠한 이야기를 꺼내도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편지 쓰기가 좋았다.


학교가 끝나면 가장 먼저 달려간 곳도 문구점이었다. 신제품이 입고되지 않아도, 매일 똑같은 디자인이 같은 자리에 꽂혀있어도 마냥 좋았다. 편지지는 활짝 핀 장미처럼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게 신기했다.


편지지는 천 원짜리가 대부분이었는데 하루 용돈이 천 원밖에 되질 않는 걸 고려하면  큰돈이었다. 다른 친구처럼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고, 편지지에 하루 용돈 전부를 투자해야 했다. 엄마에게 편지지를 사야 하니 용돈을 더 달라고 하면 큰일난다. 이미 우리 집 책에는 다양한 편지지가 꽃혀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정중하게 부탁을 할 때마다 붉은 고추처럼 약이 바짝 오른 모습을 한채  "돈지랄"한다고 했다.  뭐, 엄마는 나에 대해 잘 모르니 그럴 수도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엄마는 편지란 걸 써본 적이 없으니까.  그 옛날  아빠와 선을 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니, 엄마에게는 어떠한 낭만조차 남았을 리 없다. 그저 엄마 수준에서 '잘생긴 남자'로 통했던 아빠는 그렇게 엄마의 편지 한 통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편지지 중에서 가장 먼저 느낌이 찌릿하게 오는 편지지가 있다. 마치'나를 선택해 주세요. 나를 선택하면 당신을 구름에 태워 저 멀리 이야기 세상 속으로 이끌어 줄게요.'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그래, 이번에는 분홍색 구름이 그려진 너를 선택했다. 편지지에 많은 그림이 차지하고 있으면,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을 수가 없으니 적당한 선과 여백이 있는 편지지가 좋았다.


책상에 편지지를 사뿐히 깔았다. 나비나 잠자리가 편지지에 앉아서 놀아도 될 만큼 고요한 시간이어야 한다. 편지지를 앞에 두고 머릿속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펜이 움직이는 대로 사각사각 사뿐히 써 내려갈 뿐이었다.  때로는 계절이야기를, 엄마가 나를 볼 때마다 매번 돈지랄만 한다고 속상하다 푸념을 털어놓기도 했고, 강아지가 새끼를 열 마리나 낳았는데 전부 황구만 태어난 이야기도 꺼냈다. 상대방은 편지를 읽고 있지만 마치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 게 편지내용의 핵심이었다.


며칠이 지나 그에게 답장이 왔다.

"고운 단풍이 떨어지더니 어느새 첫눈이 내려서 기분이 좋았다. 함께 첫눈을 맞았으면 참 좋을 텐데... "

" 돈지랄만 한다는 엄마 마음을 이해 못 하면 어쩌니."

"백구가 아닌 황구여도 새끼 강아지는 모두 귀엽더라."


상대에게 답장이 온 다음날이면 언제나 그렇듯 맛있는 걸 포기하고 문구점으로 달려간다. 전에 보냈던 편지지보다 더 곱게 생긴 걸 고르기 위한 일종의 의식행위라고 해야 할까. 허름한 운동복과 꼬질꼬질한 운동화를 신고 있지만, 그에 비해 예쁜 편지지를 고르는 안목은 있었다. 아마도 상대는 나를 편지지처럼 예쁘게 생긴 사람이라고 상상할 것이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나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오롯이 편지 쓰기뿐이었으니.


참 신기한 세상이다. 내가 상상하는 그 역시 누구보다 잘생긴 왕자님이었으니, 그렇게 우리는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영원한 펜팔 친구로 남았다.


문득 그가 떠올라 편지를 쓰고 싶은, 사각사각 펜소리가 그리운 별이 빛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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