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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자'에서 '대자의 세계'로 이동하는 문학도생들

적어도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떨어지는 사과만을 보지는 않겠지..

by hyejoocontext



독일 관념론 헤겔에 말을 들러서 '즉자'와'대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물의 존재 자체를 즉자라고 한다면 대상을 정립하는 의식을 대자라고 한다. 어떤 사물을 보고 우리는 나와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눈앞에 한마리의 고양이가 있다고 치자. 그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라고 생각을 한다면 사물의 존재로써만 인식하는 '즉자'에 해당한다. 반대로 고양이를 보며 배를 고플까, 춥지는 않을까, 길에 치이면 어쩌지 하고 자신의 의식을 포함해 생각하면 '대자'가 된다.


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사물의 모든 것들을 오로지 그 사물로써만 인식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다른 이미지나 역할 혹은 의미로써 작용한다. 그렇게 작용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연민을 가지고, 감정을 더 윤활하게 씀으로써 시를 쓰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민감한 편에 속한 사람'만을 통칭하지 않는다. 사물의 본질만을 알려고 하지 맑 <자기에의 현전>으로 부터 시작해 대자의 자체의 존재성을 인식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물은 '나'를 통해서만 의미나 가치부여 혹은 인식이 된다. 나에 대해 적날히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주변의 환경과 사물을 보고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이 그리 장황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전부 거의 대부분 즉자에서 대자의 세계로 이동하는 유목민이다.



사과 하나를 보고도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사랑일수도 먹음직스러운 과일안의 또다른 의미의 세계를 창조한다. 세상은 모두 '존재하는 것'들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이가 고단하고, 고단하기에 글을 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대자의 길로써 생각해서 가더라도 서로의 공존을 통한 자비의 길로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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