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공자사상 그리고 고대, 중세 서양 철학 기본 설명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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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기록으로 남긴다는 부분에 관해 '작가'들은 조심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부분에서- 어쩌면 '자유'와는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플라톤과 공자 사상을 즐겨 본다. 왜냐면 그들은 고전 중 최고로 근대사상가로써 많은 책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21세기 독자들의 입장에서, 서양의 잣대에서 우리는 바라보게 되는 습관들이 많아서.
공자와 플라톤의 사상이 낡은 사상가로써 이제 여겨지는 것. (남존여비등)
오늘은 서양의 모든 고전부터 전반 전체의 철학을 한 편에 담아 보겠다. 가볍게 읽으시되, 날로 먹겠다는 생각으로 이 칼럼을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 '숙고된 나의 글을 남기기 위한 목적'이 크다. 여러분 각자의 철학을 남길 수 있는 2022년의 가을 해가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해 보겠다.
01. 서양 고대 중세 철학
플라톤의 책에는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이 한명 있다. 바로 '소크라테스' 이유는, 플라톤의 스승이었다.
<플라톤 책 2권만 읽자!>
알레테이아 aletheia = a(부정어, 접두사) + lethe(레테)의 합성어이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핵심 단어이다. 여기서 '레테'는 *레테의 강 (망각의 강)을 뜻한다. 기존 전제는 탈 은폐 그러니까 '다 알았다'라는 뜻이며,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실을 아는 것 = 죽음을 뜻하는 것이 된다.
*레테의 강은 저승의 다섯개 강 중 하나로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갈 떄 지상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마시는 강의 물이다.
우리는 살면서 시간을 지나는 만큼 과거를 잊게 된다. 이를 우리가 '망각하다'라고 표현한다. 이를 반대로 우리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을 '각성'한다고 한다면,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희랍의 신화의 일종으로써- 삶이 고통스러운 것(진리의 세계, 사실의 세계)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는 삶에서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플라톤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전개속에 철학을 논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적인 쾌락이나 욕망을 거부하는 목적이 '성스러움'으로 표방되고,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과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산파술과 레테(aletheia)는 위의 내용에 거의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크라테스의 산파술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으로 진리를 다시 기억하도록 만드는 기술
어떤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볼 때, 즉각적으로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철학'을 공부하는 최종 목적이다. 서양철학에서는 '기독의 신의 역할'과 '플라톤에서 말하는 제작자로써의 신의 역할'은 다르다.
플라톤의 시각은 어떤 사물을 '하나의 질료 형상(eidos)'와 '질료 형상를 결합해 물질을 만드는 제작자(demiourgos)' 그리고 '그 중심을 잡아주는 깃대(ananke)'의 3가지의 형상으로 잡고 본다. 의자는 '다리의 대'와 '솜을 넣은 시트'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기술자'가 필요하다' 이를 형상, 제작자(=신), 질료(=아남케)라고 분류해서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형상'이며,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우주론이다.
형이상학적이다 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이는 '형상'을 포함한 말이다. 이것을 찾고자 하는 플라톤이 '산파술'로써 그 '형상(eidos)'을 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엔트로피'라고 하는 무질서의 가장 작은 질료(*아낭케)(ananke)를 설득한다는 말이 나온다.
* 아낭케는 신. (그리스 로마 신화)[무질서하고 방황하는 무한정자(apeiron), 즉 질료의 세계]
* 플라톤의 우주론 : 제작자(demiourgos), 형상(eidos), 그리고 아낭케(ananke)
플라톤을 생각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해야 하고, 그 신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올라야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오르면 '아테네 학당'을 떠올릴 줄 알아야 한다. 형이상학을 주장한 플라톤을 반대한 스승 '아리스토 텔레스' 이 둘의 관계와 사상에 대해 간단히 짚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람의 형상'이 1명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322)의 입장에서는 제 1실체와 제 2실체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제작자 한명이 있다. 그 제작자는 제 1실체이며, 이는 여자와 남자로 볼 수 있고 '제 2실체'로는 사람인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상을 말하지만, 이 추상화에 대한 지적을 하는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 텔레스였다. 그에게는 환상이나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 별로 없다. 우리의 몸은 살점과 뼈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면, 사람은 여러 장기들(여러 형상)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상개념'으로써 실체를 보지 않고 '제 2실체'를 형상화 하는 데서 '이데아'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 '제2 실체'를 붕괴 시킨다면 '제 1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 텔레스'라는 것이다. 굉장히 과학적인 논증인 것이다.
제1실체는 형상(eidos: forma: form)과 질료(hyle: materia: matter)가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내 수많은 피부와 장기등의 질료들이 없다면 '나'는 없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형상은 개체가 소멸되면, 질료로부터 떨어져 나와 영원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사유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2실체는 제1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제2실체란 제1실체가 있을 때에만 사유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는, 다른 식으로는 '테세우스의 배'신화와 닮은 것이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테세우스의 배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출처 : https://namu.wiki/w/%ED%85%8C%EC%84%B8%EC%9A%B0%EC%8A%A4%EC%9D%98%20%EB%B0%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