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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 슈타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이러해 따위의 본질은 무엇일까?

by hyejoocontext

"책상에서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그렇다면 책상은 인간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본질을 미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비트겐 슈타인은 말한다.


《철학적 탐구》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이러해"하고 나는 되풀이 해서 중얼거린다. 만일 내가 나의 시선을 이 시선을 이 사실에다 그저 아주 명확하게 맞출 수만 있다면, 나는 틀림 없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라는 말을 한다.


책상에 앉아 책상은 이러해야 한다는 사후적 구성의 메커니즘은, 이미 사물의 본질을 다 파악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우리는 구성한 본질을 절대적인 구성으로 믿고 느낀다. 그래서 절대화된 물질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연계성을 구현한다. 이를 본질주의자의 시선이라고 한다. 심각한건, 이 사유가 편집증적으로 발현될 때다.


우리는 어떤 사물에 관하여 그것들이 목적이 이러이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하나의 램프라는 것, 빛을 비추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방을 장식한다거나 빈 방을 채운다거나 하는 따위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이니 비본질적이니 하는 것들이 언제나 명료하게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 《철학적탐구》비트겐 슈타인


이런 부자유를 해체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오래전부터 공을 이야기 한다. 어떤 물질의 본질은 '자기동일성'을 의미하는 '자성'이라고 불린다. 다시 말해 무자성을 가장 강조해온 공 空을 강조하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 도원이 편찬한 《경덕전등록》에 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단하 스물이 목불을 태운 '단하소불'의 이야기다. 혜림사에 들린 단하 스님이 나무로 만든 불상을 태워 불을 쐤다. 이때 혜림사의 주지는 불상을 어떻게 태울 수 있냐고 비난한다. 이에 단하는 사리를 찾으려고 나무를 태웠다 말을 한다. 이에 혜림사 주지는 말했다.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


이 대목에서 목불은 부처가 아닌 나무라 자명한 단하는 꺠달음을 얻는다. 본질에 대한 집착을. 중요한건 상황과 문맥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다. 목불에 절을 하건, 떌나무로 쓰건 상관없다는 자유 말이다. 법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본질로 부터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얻어야 한다.


비트겐 슈타인은 서양철학사의 주류는 본질주의를 거부한 불교와 배타적 집착을 비판한다. 본질 주의는 서양의 발원지인 탈레스에서 시작한다. 모든 본질은 물에서 시작하고 이 중심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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