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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Oct 27. 2022

인생도 사랑도 고통을 많이 겪을 수록 삶이 풍성해진다.

마종기, 「호두까기」와 한스 에리히 노삭 소설 그리고 스피노자 『에티카』







어제 내가 당신을 간절히 안았듯

오늘은 당신이 안아주세요.

딱딱한 껍질은 언제나

근엄하고 정확하지만

일상의 화장을 벗어버리면

당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부드러운지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로운지.

역사의 주름살은 도도하게 어둡고

시간은 피와 살을 빠르게 지나갈 뿐,

타성을 깨는 아픔을 참아내는 것만이

당신과 나 사이의 우주입니다.

겨울 그림자는 늘 수상하고

두렵고 길고 춥기만 합니다.

오늘은 당신이 나를 안아주세요.

내일은 내가 두 무릎 꿇겠습니다.


-마종기, 「호두까기」










1) 사랑은 극장에 있는 인물과 같다. 다른 관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두 인물간의 감정의 소통이 이어지는 것이다. 서로가 말하는 대사는 각자가 가진 감정의 대사일 것이다. 어떤 대사의 오고감이 섞이면서 완전한 통일감을 가진다는 것. 그 정도의 집중력과 밀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이 '드라마'같았는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슬픔과 우울이 드라마 같은가?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드라마가 아니다. 사랑은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 내 과거 나의 모습들이 전부 자해적으로 부정적 해석이 이어진다. 그러니 만약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는 감정 역시 당연한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 언어의 단절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드라마'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행복의 과정? 확신은 없다. 의미부여의 척도에 다름이다. 내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그것이 '상처'가 되는 것이고 '사랑'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입으로 '난 변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애초 '바뀔 의지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랑도 어떤 측면에서 '내가 사랑에 빠졌다'라는 것도 '내가 정한 척도의 마음'이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흐름속에, 내가 만난 어떤 상대에게 사랑에 빠짐은 '첫 만남'이 아닐 수도 있다. 만나다 어느 순간 '딱 한번' 우리의 기억, 기대, 과거, 현재의 모든 색이 채워지면서 '의미'가 채워지는 순간 !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도 말하는 것이다. '그 얼굴은 그냥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의 그의 얼굴은 행복할 때의 그것이었다.-늦어도 11월에는' 라고 말이다.





우리는 거의 마주보고 서 있었다. 무척 가까운 거리였다. 내가 테이블에서 일어나자마자 테이블은 곧 사라져버렸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안개구름처럼 낮게 떠올라 우리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흔들리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서 있는 마룻바닥뿐이었다.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 분명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니, 내가 한 말 같았다. 내 목소리가 그대로 메아리쳐 되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말 진실이었다. 다른 말을 했다면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최초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그냥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의 그의 얼굴은 행복할 때의 그것이었다.

- 한스 에리히 노삭(Hans Erich Nossack, 1901-1977), 『늦어도 11월에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금방 적응하기도 한다. 나는 사람들이 예민해야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자기합리화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주고만 싶다. 가정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며,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벗어날 의지를 찾지 못한다. 그렇기에 '지금 과거가 불행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말이다- 역설적으로 '지금 행복하다'는 말의 반증인 것이다.


그러니 집에 처박혀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다른 사건의 전개'를 만나야 한다. 집에 머무른다는 것 자체가 '과거'에 머무름이고 이는 '불행'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시간을 흘러가거나, 공간에 머물러 있음에도 내 스스로 벗어나려는 행동의 발악을 해야만 한다. 주인이 되어야 한다. 부모의 말을 어겨야 한다. 반항적인 마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함'이다. 부모들이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인정하고, 발전시켜주거나 보호해줄거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2)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타인의 감정을 읽으려고 하느냐?'에서 결정된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어른'인 경우도, 독립된 사람이 '어른'인 경우도 여기 있다. 독립은 '사랑함을 지킴'이고, 사랑함을 알기 위해서 가로 막는 가벽들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집중도를 가지려는 것이기에. 누군가를 보고 '사랑해'라고 말함이 '사랑함'은 아니다.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없다. '어느 순간' '어느 때에' - '궁금해 지는 그 과정'인 것이다. 


:

*


여기서 한가지 말을 덧붙이자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아니다. 다 아는 순간 사람에게 가해지는 건 대개는 '폭력성'이다. 폭력성임에서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랑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분은 '내가 상대방에 대해 다 안다'는 그 편협함을 버린다는 것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랑은 '질서를 붕괴시킴'이다. 사랑은 원래 그런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배신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


가정으로 부터 나오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해서 나오는 경우와 혼자 독립되어 나오는 경우는 의외로 구분이 쉽지 않다. 왜냐면 가족의 질서를 빠져나와 다른 가족의 질서로 들어가는 것과 독립된 사회의 질서로 들어가는 것의 그 '무거움'은 원칙적으로 어렵고도 혁명적인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향해 마치 아틀란티스 소녀처럼 순수한 마음 호기심을 가지고 떠나는 걸까? 대단한 무거움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집 나가면 힘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집을 떠난다. 그 대상은 '나 자신'일 수도 있겠다.





3) 사랑하는 사람앞에서만 당당하면 된다. 어차피 다른 모든 것들은 재 분배되기 마련인 것이 인생이다. 


 사랑은 그정도의 강도이다. 사랑에 대한 '행복'은 가볍게 말할 수 없다. 어떤 조건들을 따져가며 만나 결혼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취집'이지. 요즘 현대인들중 '취집'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행복해 보인다. 그걸 굳이 입으로 누설하듯 드러내는 그 이질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이면의 저주스러운 가정생활이 조금 느껴진다.








사랑을 한다는 것. 부모들은 직감적으로 안다. 자식이 자신을 떠나고 있는 그 느낌 말이다. 가족은 '무리'이며 '공동체 조직'이다. 그들의 규범속에 빠져나가는 것. 그곳의 반장이 부모와 같은 것이다. 뭐 그런 느낌이라면 사랑은 확실히 조직에 빠져나와 규칙을 어기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스스로의 비범함이 분명하다. 왜냐면 '부모와의 안정감, 기존체제에 대한 튼튼한 벽'을 넘어가서 '불안정한 사랑의 조직체'로 들어간다는 것. 사랑자체는 그러해서- 굉장한 것이다. 


조금 잔인하게 이야기 하면 부모가 드러누워서도, 밟고 건너가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에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

-철학을 위한 선언(Manifeste pour la philosophe)




4) 사랑은 서로간의 '합의하에 헤어짐'이 아니다. 한 쪽에서 잡고 있었다가 손을 놓는 것이다. 


잡고 있는 것이 '원래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이다.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기에 흔히들, 시에서 '봄처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쎄게 잡고 있는다고 손이 빠져나가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사랑은 진짜 힘든거다. 


윤하 노래 중에 '봄은 있었다'라는 노래의 가사와도 비슷하다.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운 것이다. 근데 사랑이 아니라도 그 누구라도 내 옆에 누군가 있어준다는 것은 '고마움'이다. 당연한게 아니기 때문에 오만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사랑으로 기쁨을 원한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질투함은 있을 수 있겠지만 감당을 하고 옆에 있어준다는 것. 강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기쁘지만 동시에 싫어지기도 한다는 것.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말하자면 아래의 사랑에 대한 테제들을 적어야 한다. 김수영 시인은 말한다. '모든 이들은 불온하다'? 사람들이 지금 느끼는 모든 억압에 대해 탈피하려면, 지금의 억압된 상황은 예민하게 따질 수 있어야 한다. 의식의 낙후성을 자각해야만,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생각없이 개구리를 죽이는 것처럼. 그러한 폭력성에 쉽게 노출되고 행동을 따라하는 인간들이 있다.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노라면 사랑은 정말로 21세기 '더 어려워 지는 기적과 같은 행위'가 되고만 만다. 우리는 어디까지 성찰에 이르렀을까? 진지하게 '핵심'을 우리가 앞에 두고 직시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 대해 너무 과잉되어 좋게 포장한 적은 없는지도 체크해봐야 한다. 그래야 사랑을 할 자격도 있다고 본다... 나는 적어도 어리숙하면 사랑에 대한 해석도 '정답내리지 말자'고 생각한다. 답이 많다고 그것이 다 맞는건 아니다.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둔다. 자신의 삶을 축복과 같이 여기게 된다. 위의 테제들을 체크해 보아도 하나도 틀린 말이 없음을 우린 알것이다.



조용한 가족은 위험하다. 억압된 아이는 분명 평화로워 보이지만 조용하게 뛰쳐 나간다. 사랑의 붕괴를 아이는 알고 있다. 그걸 모르는 부모는 아둔한 것이다. 상대방이 폭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피력하고 아이는 이에 따라서 자신의 욕망을 없애 버린다. 그 상황이 얼마나 지속이 되는가? 아이는 터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결혼도- 사랑도- 쉽게 생각할 수 없지만 우리가 본질적으로 '정직하게 추구해야 하는 욕망'인 것이다. 사랑은 배려이고, 정직함이며,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야 타인도 배려하게 됨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언젠가 상처를 받은 과거를 안고 있을 것이다. PTSD라고 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그럴때 그 것을 생각하고 즉시해야만 하는 순간은 분명 있어야 한다. 아프겠지만. 당신이 언젠가 그 상황을 또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서 상처를 더 깊게 베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상처의 과거를 바라보고 어디서 어떻게 해야 했는지, 왜 사건의 정황이 그렇게 갔는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그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그저 보지 않고 있으면 안된다... 알려고 해야 한다. 그럼 그 때 당신이 미웠던 상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사실 다 비슷비슷하다. 그러니 집중도를 가지고 바라보면, 알게 된다. 아. '교섭'이 되지 않았구나. 그 지점을..그 지점을 이해한다면, 죽을 때 쯤은 수많은 고통으로 풍요로운 삶을 경험하고, 사랑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워 지는 지점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처를 잘 하게 될 것이라 본다. 




고민해 보자. 사랑과 당신의 상처에 대한 이유와 그 행동의 대처에 대한 목록을 써보자.
카페에 혹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당신만의 '사랑에 대한 우정에 대한 상처의 회복에 대한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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