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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Oct 26. 2022

사랑은 아픔이다. 사랑의 이별 이후 영원하기 위한 원칙

천혜은「너를 팔아 사과나무를 산다」니체『도덕의 계보학』스피노자『에티카』





위의 두 시집선들을 먼저 추천 드립니다.







문인들이 글을 쓰는 목적중 하나는 독자들이 현 시대를 살아가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문정희 시인님, 주체성을 살려 감정을 솔직하게 쓰신다.





사랑,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

이 나이에 무슨 사랑?

이 나이에 아직도 사랑?

하지만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겁도 없이 나를 물어뜯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 손가락에 불붙여

사랑의 눈과 코를 더듬는다

사랑을 갈비처럼 뜯어먹는다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 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


-문정희,「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네루다 풍으로」



*


상처가 난 사랑. 그리고 그것을 지켜갈려는 지속성이 있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서로가 힘들어지는 구간에서 '헤어짐'을 고하지 못하고 만난다는 것이 무엇일까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다. 


예민하게 문맥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문정희 시인님의 시를 읽으면서 비관적이라 해석할까

이별의 헤어짐도 그렇다.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연인들은 '사랑을 지속'하기 위함일까

그렇지 않고 자신들만의 '지켜야 하는 연인들의 묵언의 약속'들 마냥 억지로 부둥켜 잡고 있는게 아닌가


이별은 단번에 아프더라도 그렇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영원성'은 없다. 사랑은 빠져나간다. 그걸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대를 잡고 괴롭힌다.

지배당하고 지배함을 벗어나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보내주는 것이다. 닭백숙을 먹을 때 닭 목을 칠 때도

단 번도 쳐야 하듯 이별도 단호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와 나를 위한 자유이기도 하며,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배려'이기도 한 것이다.






가벼운 발길로 몇 걸음 옮기다가 돌아서더니

나른한 음성으로 한다는 말이

다달이 한두 번씩은 어렵겠지만

라디오FM에서 가끔은 맘에 드는 음악을 들어보게 되듯이

마음 내킬 때는 서로가 마땅한 때를 골라

바람도 쐬듯 그렇게 바람소리 같더라도

사소한 소식이라도

아름 아름으로라도 건네 주고 건네 받자고

자잘구레한 부탁이라고 윙크까지 곁들이고는

차에 올라타더니 다시 내다보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쳐서는 혹시

타다 남은 심지에

파란 불꽃 다시 켜질지 모르지 않느냔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궂은비만 내리는 하늘에다 무슨 고함이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유안진, 「포스트모던한 이별식」



*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좋은 일만 기억에 남는다. 어느때 였을까.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가 17살때였다. 고교 시절. 그 3년은 지옥이었다.

수능을 치고 졸업식날 친언니가 내게 준 편지의 내용을 기억해 본다.


"혜주야. 지금 많이 힘들지? 혼자서 버텨내는 우리 막내 동생 내가 사랑한다!

지금 힘든 일이 많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좋은 일들 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니 견뎌보자!"

그 말이 아직까지 진실이며 사실이다. 



연인과 헤어질 때는 정말 아프고 좋지 못한 모습을 서로 보이며 헤어질 수 있지만

헤어진 이후 그 연인과의 기억들은 '아름다운 기억'만을 간직하게 된다는 점을 우린 알고 있다.

지난 과거의 힘든 기억이 아닌, 어떻게해서든 '예쁜 기억'만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우린 직감적으로 다들 알고 있다. 다시 만나면 다를 것이라고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많이 감정을 드러내고, 아팠다고 말하고 화내고 표현해야 한다.

마음의 상처를 표현하고 상대와 헤어져야 한다. '헤어짐'이 목적이라서가 아니라 '감정의 억압'으로 회귀되기 위해.







정념은 그것과 반대되는 정념,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정념보다 더 강한 정념에 의하지 않고는 억제될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다. -에티카(Ethica)ⅣP7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낸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






모든 언어는 결국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어 하나를 떠올리자. 비행기. 나무. 책. 커피 등등. 그 단어 안에 떠올리는 나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진실인가?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정의를 내리는 단어의 의미들은 '내 머릿속의 착각'일 수 있다. 어쩌면 그러한 과거로 인해 현재에 대한 계획이 '예측되어질 정도의 계획'이 되는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에서 감정을 증폭시키고 상실시키며 그 중간의 덧난 트라우마를 표현을 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증표'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용기를 내기 위해 적어 남기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결론을 아무렇지 않게 날조해 '모든 과거'를 좋게 낙관적으로 해석해버릴 수 있겠지만, 시인은 '결론'부분에서 더 많은 용기를 내어 어떤 증표로써 솔직함을 새겨 넣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어떤 감정의 현재성을 가장 잘살리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들 인 것이다.






인간은 '결론'을 좋게 만들고자 애쓰는 생명체이다. 다행히도 이별의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사실이다.

치유 능력이란, 약을 먹거나 연고를 바르거나 주사를 맞을 수 있지만, 삶을 끌고서 그냥 가다보면 '찢어진 살이 붙듯' 되는 것. 그런 것이다. 건강한 사람일 수록 살이 빨리 붙는 것.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 나오는 말이다. 영원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들은 변한다. 강박증 적인 모든 '집착의 사랑'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적당한 정도에 서로 머물다가 헤어짐을 고하는 것.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흉터'였더라도- 다를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말하듯, '감정이 무뎌지면서' 흉터에 살이 붙는 것이다.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에 나오는“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The Will to Power)”






슬픔은 인간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하다.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머물고자 하는 코나투스를 감소시키거나 방해한다. 그러므로 슬픔은 이런 노력에 반대된다. 그리고 슬픔을 느끼는 모든 인간이 노력하는 것은 슬픔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인간의 활동 능력의 그만큼 큰 부분에 대립한다. 그러므로 슬픔이 더크면 인간은 반대로 그만큼 활동 능력으로써 슬픔을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에티카(Ethica)ⅢP37d











네가 버리고 간 오후를 줍는다

버림받은 것은 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손톱으로 꾹꾹 눌러

구겨진 시간을 피고 길을 만든다

너는 가고 낡은 광주리에 담겨있던

네 그림자를 내다 팔기 시작한다

네 다리를 한 짝 내어주고

길 위에 심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산다

네 남은 다리 한 짝을 마저 주고

사과나무 여린 잎의 그늘을 산다

다리 없는 너를 안고 나무 아래 누워

네 차가운 배를 어루만지고

네 눈알을 만진다 팔과 머리통도…

길 밖에서는 해가 진다

저녁도, 밤도, 이곳에는 없다

네 눈을 팔아서 아침을 사고

따스했던 네 두 손을 팔아

사과나무 뿌리를 적실 이슬을 사고

-천혜은, 「너를 팔아 사과나무를 산다」



사랑은 언제 떠날 지 모르는 아픔이다. 사랑은 아픔을 알고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서툰 사람은 '사랑의 유예기간이 짧다' 왜인지 아는가? 바로 '상대의 자유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 사랑한다면, 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한없이 조심스러워 진다. 함부로 상대를 대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 헤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든 우리는 이별할 조짐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니, 사랑의 아픔과 이별을 아는 사람. 고밀도로 사랑에 대해 아는 이는 이 예민하고 금방 부러져버리기도 하는 상대에 대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럼으로 오래 연애를 하게 될수 있다. 









눈독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 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

-이인원, 「사랑은, …」



상대를 물방울처럼 대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행동은, 내가 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토란잎 위 물방울. 이인원 시인님이 정말 잘 포착하신 것이다. 눈독 들이는 사랑. 무한한 인내와 기다림의 사랑인 것이다. 


이성복 시인이 했던 말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그래서인지 어차피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가장 편하게 사랑할 수 방법이 되는 것이다. 마치 요즘 사람들이 '짝사랑을 하는 것이 재밌다'라고 하는 말처럼 말이다.



가볍게 쿨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걸, 현대인들은 이미 아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요즘 사람들은 정말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무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백지(tabular rasa)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중간(milieu)으로 미끄러져서 들어간다. 우리는 리듬들을 취하거나 아니면 리듬들을 부여하기도 한다. -스피노자: 실천철학(Spinoza: Philosophie practique)









사랑은 여러번 넘어져야 하는 것. 그러니 '첫사랑'이 결혼일 수 없는 것이다. 계속 넘어지고 사랑의 경험을 한 사람이 '사랑'을 아는 것이며, 성공하는 결혼도 하게 된다. '성공'이라고 표현함은 좀더 읽는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느끼기 위해 이렇게 썼는데,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성공한 결혼'이 가능하고, 이는- 사랑의 넘어짐을 계속해서 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당신은 사랑이 무서운가? 중요한건, 당신이 극점에 다르도록 노력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 이후는 다를 수 있다. 지속. 이 것은 꽃을 키우는 것과 같으며, '제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은 축구게임이 아니다. 사랑이 영원한건 의미가 없다. 그렇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극점에 다르도록 사랑을 행한 사람들. 그 추억만 씹고 먹어도-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하고 줄 것이며, '영원성'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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