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적 '-주의'를 경계하라. 서로의 소통과 사랑에 관하여
“자신들이 낳은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교육하는 의무”
를 가졌다.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창조주의 신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무지하단다. 누가? 신이. 사람은 무지해서 이성의 법으로 지배되지 않아 아담의 후손이라는 인간은 제약이 필요함으로 ‘군주론’의 지배했다고 한다.
난 그 말이 어이 없었다. 신이 내려준 계급으로 누군가는 노예나 상민이 되고 누군가는 왕과 귀족이 되다니. 그리고 시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자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자만으로 얼마나 많은 핍박과 굶주림을 주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땅의 열매들을 빼앗았는가. 진정한 국가의 법은 전반적으로 ‘한 개인의 보호’가 필요하다. 자유를 없애고 제한하는 것이 ‘법의 목적’은 아니다. 입법부에서는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고자 하는 쪽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양쪽의 최소한의 대립을 줄이기 위한 법을 만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양육해줘야 하는 의무는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신의 권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부모는 최소한의 양육기 시절까지 아이를 보호하고 키워 20대 이후에 보내주면 된다. 신의 의탁에 의한 ‘법’의 기준으로 지어진다면 그럴 경우 분별력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통제해야만 할 순간들이 ‘자신과 아이’사이에 죽을 때까지 존재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자연법이든, 실정법이든 인간이 따르는 모든 법이 유효하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자연법을 부정한다.
자연법을 체득하게 성숙하게 된다 해도 ‘자유의 허용성’은 일정 선을 긋고 정해져 있어야 한다. 이성의 상태, 이러한 분별력은 ‘영국법’에서 시초로 시작되었다. 힘이 없고 나이가 많으나 의지할 곳이 없으면 국가가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돈이 없어 버려진 아이들은 자유로운 교육아래 허용되어져야 하는 모범적인 국가 시설들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호소할 곳이 없어 ‘하늘에 비는 자’들을 안다. 나도 눈물을 흘리며 정말 너무 의지할 곳이 없다 느낄 쯤은 절이나 성당을 찾아가곤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조차 도와주는 건 신이 아니라, 힘들어 지쳐 앉아 있던 내 옆에 다가와 내 말을 들어주고, 밥을 사 주었던 이름 모를 이웃 몇몇이었다. 사람이었다. 신이 아니었다. 신이 불러왔을까. 정말 그럴까? 국가도 한 개인이 ‘자유인’이 되기 까지 민주주의라면 ‘충성서약’따위는 없어야 한다. ‘신의 법’이 위험한 것을 예로 들어 보면, 자식을 보살피는 부모의 당연한 의무를 잘 살펴볼 수도 있겠다.
자식을 살피는 부모는 그 ‘부권의 행사’가 ‘절대적이고 전횡적인 지배’가 아니다. 자신이 권력자여서 돌보는 의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권의 행사’는 아이가 장차 어른다운 어른으로 키워내야 하는 어른으로써의 역할이다. 여기서 ‘어른은 보호자’다. 부모가 아니라도 자격이 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한다. 학교나 보호시설이 될 수 있고, 국가일 수 있다. ‘신의 법’이 아니기에 시민들은 ‘참정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 권력에 벗어 났기에 ‘자신의 존경, 자신의 존중, 자신의지지, 자신의 순종의 권리’를 가진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린 존경하지도 않는 자를 존경하고 지지하고 순종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뺏는 행위가 아닌가?
미성년이 지나 자식의 재산과 자유 신체 생명까지도 ‘부모가 참관해서는 안된다’ 요즘 사람들은 의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런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과 존중, 부양과 보호, 감사의 의무는 필요 하겠지만, 최고의 은혜는 권력으로써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경의를 표한 후 자신의 의지로 어른다운 어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혼자 밥벌어 먹고 살기 더럽게 힘든 삶이지 않는가? 그러니 부모에게 의젓한 모습을 보인다는건, ‘버티는 어른’임을 하루 하루 보여주는 것이니, 그 보다 뿌듯하고 잘 자란 ‘은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식의 재산을 빼앗거나 탐하고 양육까지 바라는 못된 부모가 있다. 작년 모 연예인 사건을 떠올려보니, 가족이라는 사람이 한 아들에게 한 짓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았다. 막내는 어리광부리는 역할이 아니다. 오히려 막내가 조숙하면, 뒤처리가 는다는 것을 그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가족의 세습과 정치적 군주 행세는 없어야 한다. 왕국의 구조와 관습이 아직 유럽에 다분히 남아 있지만 군주는 ‘사제’의 태도로써 마치 갓 태어난 짐승이 얼마되지 않아 자연으로 자립해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시민 사회의 법과 분위기가 생성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논쟁을 즐기지 않았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법하면 입을 꾹 닫는 쪽이었다. 겁이 너무 많았다. 사립 여학교에 입학해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 틈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성적은 복도마다 전시되듯 붙었고, 동아리 내에 아이들과 경쟁 아닌 글쓰기 경쟁으로 ‘인류애’를 지키기 보단, 상처와 왕따로 겉돌 듯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학을 입학한 후엔 교수님과 동기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래선지 어린 시절의 과분한 그 쓸쓸함과 가난함속에서 훌륭한 사람으로써 처음으로 느낌을 받았던 그 4년의 시간이 그립다. 그리 좋은 대학은 아닌 4년제 사립 지방대 국문학과 생이지만, 순수한 노력으로 국문학과의 글쓰기 집단에 글을 쓰면서 영화활동과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양한 학벌의 아이들과 외국인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밝아질 미래를 그렸다기 보다는 그때 그때 끌리고 선택하는 쪽으로 살아왔다. 사람들은 내게 ‘목표 지향’의 힘? 뭐 그런게 부족하다고 했지만 당시 내 삶에서는 영화와 책으로 보는 넓은 세상의 창과 혼자 이사를 다니며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들이 내 독립성을 아주 편집성적으로 강하게 만들어준 느낌이 든다. 나는 이미지 메이커를 하는 몇몇 소수 집단들에 역겨움을 느꼈다. 여기서 ‘이미지 메이커’란 충분한 노력이 없이 어떤 ‘분위기 연출’로? 진심은 숨기고 한 사람을 괴롭히면서 동시에 자신을 굉장히 멋있는 사람으로 포장하는 몇몇 경기도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평등은 없었다. 나는 몸이 약했다. 나는 글로써 평등으로 갈 수 있는 사상이 만들어질까? 지금도 의문이 많이 드는 쪽이다. 열망은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동성애자인 내 동기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내게 커밍아웃을 했었다. 나는 거절을 했지만 그 이후에도 친구로 지냈다. 학교내에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이런 것들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참 단순하고 이기적이다. 나또한 그렇겠지. 생각하면서도. 솔직한 마음을 표현해준 그 친구에게 나도 친구로써 사회적 잣대에 공포를 지금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회 정의는 무엇일까. 유대인 변호사들은 아직도 차별을 받는다고 한다. 어떤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어떤 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각의 다른 이유로 사람을 판단하고 폭력적으로 편견을 짓고 대우 한다는 것은 슬프다.
나는 너무 평범해서 일찍히 특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게 어떠한 배타성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여성이 차별 받고 어떤 부분에서는 남성의 집단에 끼지 못하는 사회집단을 느끼면서 나는 법을 아니, 사회과학 분야에 대해 세밀하게 공부 하고자 싶었다. 동물 권익 보호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도 있다. 학문은 ‘여유에서 오는 자세’가 아니다. ‘혼란의 의자에 꽃을 피우려는 의지’다.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은, 존중받아 마땅할 일이라는 결론이 선다.
공포와 무력감은 이민자, 소수 인종, 여성등이 있다. 엘리트 집단들이 나라를 독점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나도 자주 느끼니까. 미국의 노동자 계급에 심각한 문제들이 아직도 다분하다. 인종 파별,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 상징들이 변실되기도 하고.. 말로 괴물을 만들고.. 선이 무엇인지 뒤섞어 혼란을 자아낸다. 예전에는 유대인들은 로펌의 파트너 자리에도 오를 수 없었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트렌스젠더는 써서는 안되는 용어였다. 완벽한 상태는 무엇인가? 나는 늘 되묻고 싶다.
영화 ‘헤드윅’에서 그런 장면이 있다. 신은 나를 반은 여자로 반은 남자로 탄생시켰다. 완벽한 인간의 상태가 아니다. 나는 죄인인가. 뭐 그런 느낌의 노래 가사였다. 헤드윅을 좋아했고, 비슷한 부류의 뮤지컬 영화들을 찾아보면서 차별에 대한 의심과 비난의 분위기를 우리 사회가 경청이나 하고 있는지, 노력을 하는지, 협력을 가로 막는 건 아닌지.. 의심만이 들 뿐이다. 우린 그 누구도, 타인을 알 수 없다. 두려움이란 감정도 그렇다. 미래를 알 수 없듯, 인간도 알 수 없다. 이런 ‘두려움’이란 감정이 민주적 자치에 큰 걸림돌이 된다면. 문제다.
하지만 다행히도 ‘두려움’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좋은 쪽으로 ‘두려움’을 쓰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사랑하는 사회’로 힘을 내딛게도 만든다. 나도 그랬다. 아니 지금도 때때로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끼면 ‘통제력’을 가져버린다. 통제된 상태는 스스로를 노예로 만든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장에 손을 붙잡거나 꽉 안아서 햇빛이 있는 곳에다 두고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말을 건네고 싶다. 그럴 만큼 내가 가장 힘들어한 감정은 ‘두려움’이다. 감정의 상호관계에서 나는 분노와 혐오에 대한 사회의 평가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분노와 혐오주의’ 이것에 민감한 사람들은 왜 그런걸까?
불공정을 싫어하는 한국. 사회 지도층의 문제를 참지 않는 운동들. 가벼운 분석은 삼가야만 할 것이다. 철학이 중요하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철학적 사유’를 해야 한다. 철학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겸손한 마음을 바탕으로 진실하게 논쟁을 주고받겠다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철학을 하는 자는 위협도 무시도 어떤 ‘혐오주의’로도 가지 말고, ‘소크라테스식’으로 묻고 또 묻듯 사고의 구조를 세워야 할 것이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회 지도자, 문화 권위자들, 정치자들 등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들이라고 본다. 물음표를 많이 던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면 문제는 공공 정책이나 경제 상황을 분석하는 책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답’에 질문을 또 던지는 것에 있다고 본다.
질문에는 감정의 본질, 훌륭한 삶의 연구를 잣대로 물음을 던져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약하다. 나는 무력하고 어두운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 순간은 그 꿈이 정말 현실처럼 분간이 되지 않아, 깨어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아기가 악몽을 꾸는 것처럼. 나약한 발악의 형태로써 끊임없이 ‘희망을 구하는’ 여정과 닮아 있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기는 험악한 파도에 휩쓸리는 선원처럼 발가벗은 채 누워 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 온갖 도움이 필요한 상태로, 자연의 힘으로 수툭된 어미의 자궁에서 빛의 나라로 내던져졌다. 그 상황이 평생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아기의 애절한 울음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동물들은 겁을 먹긴 하겠지만 울거나 자리에 멈춰서기 보다 벗은 몸으로 세상에 맞서며 산다. 생존의 음식, 잠자리만 필요할 뿐이나- 인간은 느린 신체 발달로 ‘동물보다 자극의 상처가 더 짙고 악몽도 재생산되는’ 생명체이다.
난 어른이 되면 ‘두려움’이 덜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갈수록 반대라는 걸 깨달았다. 어릴수록 두려움과 불안은 금방 희석되고 그 짧은 즐거움의 순간으로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어른은 어떤 두려움을 길게 생각하고 단기간의 제한된 공포로도 ‘그 순간이 이어질 거란 생각’을 하게 되어 버린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 이젠 ‘아이에서 너무 멀어져 버린 어른’이라는 생각도 든다. 두려움은 인간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우리가 공동체로써 느끼는 감정이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곧 닥칠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일에 대한 괴로움과 힘이 없단 무력감의 결함이 두려움이라고 정의했다.
두려움은 개인마다 다른 색감을 가진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 타인의 두려움의 색감은 다르다. 개인의 성격과 역사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군인들이 죽음을 느끼는 공포에서의 두려움일 수 있겠고 누군가는 버림받을 것같은, 누군가는 뒤떨어질 것 같은, 누군가는 오해 받을 것 같은, 누군가는 들킬 것 같은 것들.. 그러니 두려움이란 감정은 색채는 저마다 다른 것이다. 둘째는 두렵다는 인식을 안하는데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인간의 습성이다. 내가 굳이 '두렵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어떤 생체적 반응을 살펴보면 '두려운 상태'에 놓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만큼 두려움은 아주 가까운 감정이다. 두려움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가슴에 커다란 산이 얹혀 있는'이라는 루크레티우스의 묘사그대로 대부분이 느끼는 묵직한 억압이로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두려움은 모든 동물의 감각중 가장 '성급한 행동'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 역할과 같다. 그러니까 좋거나 나쁜 감정은 없다. 주관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그 감정을 판단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신경질 적인 사람들은 '편도체'가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다. 음. 편두통이라는 말을 알 것이다. 이 '편두통'은 척추동물이 아닌 '파충류'의 뇌로 시작된다고 한다. 편도체의 역할은 신경계 전체와 관련되어 있고 모든 동물들의 감각, 언어, 인지를 내포한 뇌의 부분이다. 뇌의 상태를 살필 때 '부정적 판단'을 강하게 인식하고 '시간을 느리게 판단' 그러니까 '판단력이 흐린 뇌'는 이 '편두체'가 과도하게 발달되어 신경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위험을 느끼면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 공포로 벗어나고자 '두려움'을 느끼면서 '반사 작용'이란 걸 한다. 이건 지극히 '원시적인 반응'인데 동물들도 그렇지만, 이렇게 두려움을 과하게 느끼는 자일 수록 '자기애'가 강한 특성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또 한변으로 '집중'력이 높으면 이 편도체가 과하게 뒤 떨어지는 것이며, 집중이 스스로에게 되는 것은 '강렬한 고통' 그러니까 자아 분열로도 이어진다.
소설 중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밤에 잠드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 해서 그의 어머니가 그의 옆에 머물다 가는 장면들이 있다. 아이는 자신에게 집중된 상태로 모든 관계를 생각하지 못한, 독립성이 너무 없는 상태에 놓인 것으로 묘사된다. 책에서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프루스트는 두려움이 다른 누구도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은 전제 군주의 감정이라는 루소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처럼 이타적 무리에 힘이 없는 (내성적이고 유약한)성격의 자아는 두려움을 더 과히 느끼는 것이다.
두려움은 '아이'들에게 강도가 강하다. 이른바 '나르시즘'의 자기애 성향은 '두려움'을 잘 느끼게 한다. 해결책은 자기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면 두려움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상대와 나를 분리하고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타인의 삶을 상상하면서 자신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중, '타인과 나의 객관적 해석'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하며, 반대로 '나의 중심으로' 돌아가버린다면 타인의 삶을 생각하지만 결국 내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나르시즘'으로 두려움은 과하게 증폭될 것이다. 말이 많고 빠른 사람들중에 이러한 '나르시즘'성향이 많은 사람들이 다분하다. 그런 사람들은 말의 속도와 함꼐 '자신의 더 큰 자아' 생성을 위해 목소리를 크게 내곤 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좀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들의 최초의 반응은 배고픔, 갈증, 어둠, 축축함등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감정이 무엇일까? 놀랍게도 '죽음'이다. 그 이후 두려움을 함축하여 경험하고 상상으로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책들에서 '아이들에게 죽음에 대한 설명을 잘 해줘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죽음은 늘 존재하며, 누구나 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을 기본적으로 혼란과 두려움이상으로 느끼겠지만... 뮤지컬 <리골레토> 처럼 큰 감동으로 느끼게도 하는 것이다. 재연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나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계속 학습하게 만드는 예술 작품을 접하는 방법 이야 말로, 두려움을 줄이고 '감정'에 대한 상황을 오해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 한국전쟁부터 미국인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무슬림에 대한 오해를 많이 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건강 보험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 것이다. 보험료가 엄청 높은 곳이 미국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후 경제 위기와 여성과 소수집단과 인종 편견이 더 심각해 져서 이에 대한 민주적 운동이 강화되었다. 어느 지점에서 대중들은 '지도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돌아가 무슬림에 대한 수사적 이용을 한 건 누구일까? 인도 국가중 가장 낮은 계급인 힌두교 신자들이 코란으로 살다 오해받는 것이 괴로워서 '이슬람이나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유가 잦은 탓도 무엇인가? 불편한 진실은 '911테러'다. 아마 그 사건에 대해 면밀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타 들은 이러저러 뜬 소문으로 우린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미국에는 범죄가 많다는 걸 여러분은 알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해 어떤 이미지가 드는가? 무슬림 테러 사건으로 대중의 의견이 얼마나 빠르게 가중화 되는가? 매스컴의 움직으로 정신적 오류와 정보의 공유가 심각하다고 느낀다.
나 역시 '신'에 대한 배타적인 경향이 있는 편이라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무슬림이나 불교 어느 쪽도 숭배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느끼겠다. 문맥을 벗어난 문장을 써버렸다. 중요한 건 '종교'이야기가 아니다. 요약하자면 무슬림에 대한 공포는 선천적 경향으로 파고 든다. 미국인들은 그 근거를 명확하게 보지 못하고 지나친 매스컴의 정보로만 매듭짓고 있는 듯 보인다.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서로간의 분쟁이 많은 국가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도 말할 입장은 못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색채'를 들먹이는 사람이다. 색이 다를 뿐이고 종교가 다를 뿐인데 좌파니 우파니 전라도니 경상도니 서울사람이니 지방사람이니 하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이 나는 굉장히 위험한 태도라 느낀다. 그런 태도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보복 욕구'를 포함하고 있기 떄문이다. 전쟁의 승리자는 누구인가? 남북이 싸워서 뭐하는가? 나는 진실로 통일을 바란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에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역시 '그 모순이 심해지는 분노'가 원흉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유아기의 무력감과 성인기에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그는 두려움이 모든 상황을 악화시키고, 결국 정치적 해악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뭘 말하는가? 나는 감정적으로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유아기적부터 쌓은 안좋은 습관'을 표출하는 사춘기 학생처럼 느끼곤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공적인 관계에 이런 발언과 말과 행동은 서로에게 실례가 되지 않나요?'라고 한다면 그 상대방들이 알아들을리 없는 것처럼. 분노는 인간의 모든 아이시절의 두려움으로 부터 폭팔된 무엇이기도 하겠다. 타인의 감정을 배제하는 인간들이 많은 21세기. 여행을 다니면서 이타적인 사람들을 만나- '사람들은 아직 공동체적인 그 마음을 아직 품고 살구나'라고 생각하게도 되었지만... 회사나 학교등의 경쟁구조속 터울에서는 가히 난 토론해야 할 문제들이라 본다.
혐오 집단은 더이상 있어서는 안되겠다. 도덕적 혐오. 그러니까 부도덕한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겠다. 니체는 초월적 자아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냉소적 절망'에서 시작된 초월의 자아성이다. 그러서인지 희망적인 삶만 말하는 이상적 세계보다야 더 그럴듯하다. 사랑이라는 것은 진실로 '꿈'과 같아서기 보단 기본적인 수준의 사랑처럼 유지되어야 한다. 지탱될 수 있는 뿌리를 근간으로 관대함을 차차 넓혀 가야 사랑이 지탱되리라 생각하고, 그 외의 사랑이나 희망은 허공을 떠도는 말이나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글을 다 쓰고 나니 내가 무슨 철학자가 된 것만 같아 신기하다.ㅎㅎ.
책의 마지막 문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 '수동적 불의'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영혼의 관대함과 위대함이 부족하며 공공의 선을 위하지 않는다. 사실 키케로는 칸트와 뜻이 같았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하지 않는다.
사실 키케로는 칸트와 뜻이 같았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실 경험이 없는 내성적이고 허약한 철학자가 아닌 세계를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키케로는 짧았던 인생 내내 두려움과 피로와 절망의 유혹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늘 공공의 선을 위한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정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로마라는 나라를 다루는 그의 글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주로 사랑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