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도에 달하는 뜨거운 공항 밖 기온과 건조한 공기는 내가 다른 땅에 왔음을 실감 나게 했다. 수많은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이곳, 세계 최대 호텔들이 모여 있는 곳, 한 해에 오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 환락과 도박의 도시, 이혼 수속이 간단해 이혼 도시라 불리는 곳. 내가 닿은 넓은 세상은 강렬했다.
그곳은 라스베이거스(Lasvegas)였다.
공항에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슬롯머신이었다. 처음 보는 기계라 돈을 넣어볼 생각도 못했다. 사막에서 주택이 즐비한 거주 지역을 지나자 화려한 중심가로 차창 밖의 풍경이 변했다. 나는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이국적인 세상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중심가 스트리트에는 각종 호텔과 여행객들, 분수쇼.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쇼핑몰이 즐비했다.
1년간 이모 댁에 지내며 어학연수를 하러 간 나는 호텔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 모든 것이 익숙해질 쯤에도 나에게 여전히 낯선 것이 있었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할 수 없는 공간에 과한 섹시함과 미소를 지으며 술을 나르는 언니들, 정장을 입고 밤을 새우느라 일에 찌든 딜러들...
카지노였다.
나는 몇 개월 만에 그 화려함과 음침함에 질리고 말았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중 하나가 라스베이거스라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플레이 룰도 잘 모르는 내가 카지노 테이블에 앉아 카드와 칩에 집중했던 순간의 감각을 기억한다. 먼발치로 보이는 명품샵의 가방들과 구두가 곧 내 수중에 들어올 것만 같았다. 내 정신은 소주를 취할 듯 말 듯 마셨을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환각에 사로잡힌 듯했다.
상자 속의 또 다른 상자처럼 그곳은 바깥세상 속에 갇힌 동굴 같았다.
카지노에는 시계와 창문, 거울이 없다. 내 온전한 정신이 빼앗기기 좋은 곳이다. 카지노 옆 클럽에 가서 마가리타 한 잔에 춤을 추는 일이 훨씬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1,6,13,37,38,40, +9
7개의 숫자는 가장 최근에 발표된 로또 당첨 번호다. 45개 중 6개의 숫자를 내 느낌대로 고르든 기계에게 맡기든 전적으로 행운을 빌면 된다. 평소에 나는 로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지만 문득 1등 당첨금이 얼마인지 궁금해서 검색해봤다.
5,809,776,094원
‘5억이겠지.’ 몇 번을 세어봤다. 아니다. 58억이라니. 내가 로또의 스케일을 너무 작게 봤다. 이번에 1등으로 당첨된 네 명의 당첨자는 역대급 당첨금을 받는다고 한다. 복권 한 장 가격 5천 원이 58억이 된다면 몇 배가 되는 건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세금을 떼더라도 엄청나다는 생각 밖에.
로또 복권 1등을 할 확률은 800만 분의 1이라고 한다. 나는 내 돈을 주고 로또를 사본 일이 없다. 똥꿈, 돼지꿈, 조상님 꿈을 꾼 적이라도 있으면 혹시 사러 갔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돈이 들어온다고 주장하는 물 꿈을 꾼다 한들 로또를 사러 갈 생각은 하지 못한다. 800만 분의 1의 확률로 20만 배의 수익을 기대하는 일이 나에게는 현실로 와닿지 않는다.
가끔 상상은 한다. ‘1등에 당첨돼서 20억이 생긴다면 뭘 하지?’ 세금 내고 서울에 집 한 채 사고 차도 사면 좋겠다. 그러다 가족들과 지인들 생각을 하니 점점 일이 커지고 계산이 복잡해져서 상상을 그만둔다. 복권을 살 돈이면 그냥 스타벅스에서 원두향을 맡으며 커피를 한 잔 마시든 유기농 바나나 한 손을 사 먹겠다.
나에게 가상의 세계로 보이는 또 다른 존재는 비트코인이다. 나는 원래 SF영화, 가상현실 VR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내 상상력의 한계 때문일지 모르지만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 나는 현실이 무겁게 느껴진다.
“비트코인 또 올랐어. 가상화폐가 이제 어엿한 자산으로 대체될 수도 있어. 우리 주식투자금 중의 5 퍼센트 정도는 코인으로 가지고 있어도 되지 않겠어?”
“난 비트코인 싫어. 정식화 폐라고 인정받기 전까진 투기라고 봐.”
“아니, 비트코인 말고 이더리움 사게.”
“이더리움이 뭔데?”
나는 이더리움이 뭔지 찾아보고 남편의 팔을 힘껏 꼬집었다. 코인이라면 귓등으로도 안 듣는 나를 놀리느라 다른 가상화폐의 이름을 말한 것이다.
코인이라면 싫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사실 남편의 말에 잠깐 흔들리기도 했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한 나라도 있다는데 트렌드와 시황을 잘 따라가는 남편과 달리 내가 너무 보수적이고 유연성이 없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비트코인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격은 매일 시소처럼 널뛰기를 한다. 코인의 오르내림에는 근거가 없다. 나는 그래서 코인을 사지 않는다.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뜨리고, 로또에 당첨되고 인생을 바꿀 만큼 코인이 오를 가능성은 희박할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비트코인과 복권, 카지노에 있는 칩을 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인생에 ‘행운 총량의 법칙’이 있을 것만 같아서다. 카지노든 로또든 코인이든 대박을 터뜨리는 순간 왠지 한 방에 행운을 다 써버린 기분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