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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이 없다

by 김세인

바람의 감촉이 다른 날이 있다.

일주일 전쯤 나는 평소와는 다른 바람을 느꼈다. 아직 찬 바람은 아니었다. 나의 무드로는 소슬바람이었다. 소소하고 쓸쓸한 가을을 예감하는. 아직 가을바람을 맞을 준비를 못했기에 살짝 당황했다.


싸이의 노래를 듣다가 서둘러 김동률 노래를 들어야만 할 것 같았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고 싶어졌다. 잡지 속 검정 목폴라에 브라운 체크 재킷을 입은 모델 사진을 보고 나도 그렇게 입고 싶어졌다.


오랜 친구들의 단톡방에는 수년 전 함께 찍은 사진들이 올라왔다. 싸이월드 사진첩이 복구되었다고 했다. 먼지 쌓인 앨범을 꺼내 보듯 나도 내 미니홈피에 들어가 사진첩을 클릭했다.


청재킷 안에 흰 면티와 주황색 후드티를 겹쳐 입은 긴 생머리의 대학생이 보였다. 대학 캠퍼스 잔디에 동기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컷은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웨이브가 살짝 있는 긴 머리에 선글라스를 얹고 바닷가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아가씨도 보였다.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DSLR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는 사진, 태국에서 망고를 먹고 있는 사진, 큰 링 귀걸이에 털모자를 쓰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산속 벤치에 앉아 있는 사진, 클럽에 갈 준비를 하는지 어깨가 드러난 미니 원피스를 입고 한껏 화장을 하고 있는 사진....


싸이월드에는 온통 내 사진뿐이었다.

내 모습이지만 낯설었다. 지금은 사진 찍을 때 이토록 어색한 포즈가 그때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두 달에 한 번은 갈색이나 와인색을 넣어 염색을 하러 가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염색하지 않은 검은 머리도 예뻤다. 싸이월드에 담긴 사진들은 20대의 나였다.




30대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핸드폰 갤러리를 열었다. 아이들 사진이 가득하다. 아이들이 막 태어나서 울고 있는 사진부터 걸음마 하는 사진, 처음 학교에 입학하는 날까지 10년 가까이 아이들이 성장해온 시간들이 담겨 있다. 아이들은 어떻게 찍어도 예쁘고 귀여웠다.


가끔 내 사진이 보이긴 했다.

화장기가 없었고 눈웃음은 눈가 주름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피부의 생기는 탯줄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달된 것 같았다. 입술은 바셀린만 발랐는지 핏기가 없었고 분명 머리는 길었는데 축 처진 말꼬리처럼 윤기가 없었다. 상의는 주로 헐렁한 티셔츠를 즐겨 입고 포즈는 어정쩡하니 다리는 더 짧고 굵어 보였다. 내 사진을 보면 왠지 초라하게 느껴져 삭제 버튼을 클릭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이 시시때때로 사진 찍는데 열중하면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요즘은 문득 내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와서 왜 내 사진이 이렇게도 없는 건지 억울한 심정은 뭘까. 아줌마가 된 후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괜히 이것도 저것도 심술이 났나.


풍경도, 음식도 말고 굳이 내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에는 어떤 욕구가 숨어 있는 걸까. 사진을 찍고 싶을 만큼 나 자신을 이제 가꾸고 싶은 걸까. 새하얀 셔츠도 입고, 예쁜 척도 좀 하고. 지나고 나면 지금이 또 젊은 날일 테니 시간을 붙들어 사진으로라도 젊은 나를 찍어야 할 것 같다.


스노우 앱으로 풀 메이크업한 효과를 누리고 흑백사진의 힘을 빌려 주름은 가리는 거다. 마스카라까지는 아니더라도 속눈썹을 뷰러로 올리고 립스틱은 오렌지톤이나 핫핑크 정도로 바르고. 눈가에 주름이 좀 지더라도 미소 짓고. 너무 활짝 웃지 말고 살짝만.


나도 모르게 그동안 주눅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모를 가꾸지 못한 시간들과 스스로 나를 의식하는 시선이 자신 없어 사진을 찍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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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친구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갓난아기를 안은 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이 말이 아니다.”

“얼굴 좋기만 한데 뭘.”

“어플로 찍은 거야. 그냥 사진은 찍을 수가 없어.”

“엄마인 모습 그대로 그 자체로 예뻐, 친구야.”


진심이었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롱 원피스를 휘날리며 화보처럼 찍은 지인 아줌마의 사진보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뒷산을 걷는 나의 모습이 더 멋들어진 한 컷일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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