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인 Oct 22. 2022

오춘기 극복 프로젝트

Vita Activa를 위하여 (4)

몇 년 전 어느 날, 독일에서 우리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남편이 주문한 그의 두 번째 자전거였다. 밝은 빨간색 베이스에 검은색이 섞인 컬러감이 돋보였다.


그의 첫 번째 자전거보다 전문적인 라이더가 타는 자전거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는 자신의 이 애마를 씻고, 닦고 애지중지 아꼈다. 헬멧을 쓰고 반바지 레깅스를 입고 자주 라이딩을 나갔다. 나는 그 자전거가 얼마나 비싼 건지 나중에야 알았다. 째려보는 나의 눈빛에 남편은 직구로 훨씬 싸게 샀다며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남편은 마흔이 되더니 갑자기 오춘기를 겪는 사람처럼 방황했다.

지금껏 공부하고 일하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문득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잦은 회식과 야근에 시달리던 어느 날, 그는 수영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자전거를 샀다. 그러고는 뭔가에 홀린 듯 철인클럽에 가입했다.


처음 회원들과 자전거 라이딩을 하고 온 날, 그는 집에 와서 그대로 쓰러져 밤새 끙끙 앓았다. 그 후로도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간 이상 이어지는 라이딩 모임을 수도 없이 따라갔다. 나는 말리지도 못하고 응원하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철인 3종 경기에 맞춰 천천히 훈련하고 있었다. 몇 시간을 운동하고 지칠 대로 지쳐 있어도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2021년 6월 남편은 제주도에서 열린 ‘태양의 철인대회’에 출전했다.

태양이 뜨기 전에 출발해서 지기 전에 들어온다는 이 대회의 이름은 참 멋있었다. 남편이 태양과 함께 움직여 무사히 돌아온다면.


나도 따라갈까 했지만 오히려 남편이 신경 쓰일 것 같아 아이들과 집에 있기로 했다. 가족들은 모두 노심초사였다. 철인경기는 몇 등을 하느냐보다 건강한 상태로 경기를 마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가장 걱정되는 건 바다 수영이었다. 몇년 전, 남편의 철인클럽에서도 경기 중 심장마비가 온 회원이 있다고 했다. 바다에 들어가면 뿌옇게 잘 안 보이는 상태로 수영을 한다는 남편의 말이 맴돌았다.

새벽에 카톡이 왔다.

검은색 수영 슈트를 입은 수많이 남자들이 한꺼번에 바다로 달려드는 사진이었다.

나에게는 생소한 장면이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중에 남편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잠이 깼다. 클럽 회장님은 카톡으로 상세히 대회 상황을 전달해주셨다.     


4시 40분. 준비 중.

5시 24분. 바다 수영 출발.

6시 52분. 수영 골인.

7시 2분. 자전거 출발.

7시 49분. 자전거 첫 바퀴 통과. 11바퀴 남음.

10시 27분. 6 랩 통과. 본부 쪽에서 잠깐 쉬면서 스페셜 푸드 먹고 다시 출발합니다.

12시 46분. 10 랩 통과. 이제 자전거 한 바퀴 남았습니다.

오후 1시 55분. 자전거 마쳤습니다. 달리기 준비 중.

오후 2시 5분. 런 출발했습니다. 달리는 모습 쌩쌩합니다.

오후 3시 20분. 런 1 랩 통과.

오후 4시 56분. 런 2 랩 통과. 2 랩 남았습니다.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너무 더운 날씨라 혹시 탈진하지는 않았는지 왜 연락이 없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오후 7시 55분. 배터리가 다 되어 소식 못 전했습니다.     


완주 사진이 도착했다.

연락을 주신 클럽 회장님은 핸드폰을 끄고 마지막 달리기 경기를 옆에서 함께 뛰어주셨다고 했다.




첫 경기 출전에 완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햇볕을 쬐며 몇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하느라 피부 상한다고, 부부는 취미가 같아야 한다는데 내가 철인을 해야겠냐고, 애들 키우는 아빠가 지금 그런 운동을 할 때냐고 핀잔을 주던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들은 우리 아빠는 이제 철인이라고 펄쩍펄쩍 뛰었다.


인간의 한계에 굳이 왜 도전해야 하는지.

남편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몸을 무리하게 쓰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철인 경기를 완주한 후,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기운이 전해졌다.


무리한 일도 포기하지 않고 차곡차곡 훈련하면 해낼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나를 밀어붙여본다는 경험은 꼭 대단한 위인들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 단순하고 진부한 사실이지만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진짜 그 일을 해내는 걸 보는 건 달랐다.


남편은 막걸리 마실 생각에 꾹 참고 몇 시간 자전거를 탄다고 말하지만 사실 천천히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느꼈을 것이다. 스윔슈트를 입고 뿌옇게 보이는 바닷속을 헤치며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했을 것이다. 발바닥과 종아리가 터질 것 같고 죽을 듯이 힘들다는 생각으로 뛰면서 그는 진짜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주식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 운동은 내가 노력하는 만큼 변화가 따라와. 힘들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해.”


남편이 철인 3종 경기를 해낸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오춘기를 이겨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떻게든 시간은 지나가리라는 무력감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었다. 나는 그 생생한 경기 현장을 상상하면서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몸으로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끝까지 소진하면서 몸을 움직여서만 얻을 수 있는 에너지로 또 채워나갔다.


자외선 때문에 생기는 기미와 주름을 기꺼이 맞아들이면서 햇볕을 쬐지 않아 얻는 병을 피해 갔다.


박수치는 사람보다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뒤로 하고 물병 하나 들고 달렸다.



스노보드 선수였던 『철인 수업』의 저자 오영환의 사진은 부상 투성이었다.

“스노보드는 순간의 실수가 그대로 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철인 3종은 순발력 싸움이 아니었다. 지구력이 중요한 스포츠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0.1초의 싸움이 아니라 내가 포기하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40대 중반의 남편은 철인 클럽에서 막내급이다.

형님들은 밖에서 보면 그냥 아저씨처럼 보인다. 그들은 단톡방에 자신의 운동기록을 남긴다.


처음부터 그들의 운동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우월감이나 허세를 찾지 못한다. 조금씩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고 다음번에 노력할 점을 업데이트하는 결심을 볼뿐이다. 그냥 술을 먹자니 몸에게 미안해 동네 한 바퀴 크게 돌며 뛰고 먹을 뿐이다.


남편의 가슴이 왜 뛰는지 알 것 같았다.

철인클럽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들 속에 생생한 기운이 가득한 한 남자가 보였다.

작가의 이전글 내 사진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