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라솔을 물려받았다
우리 집 거실은 아빠의 휴양지였다.
거실 오른편에는 아빠가 아끼는 인켈 오디오가 중후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키가 작은 2단짜리 원목 책장이 있었다. 한 칸에 10권가량 책이 들어갈 만한 소박한 공간에는 주로 〈좋은 생각〉 잡지와 신문이 꽂혀 있었다. 그 주위엔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거실 장판은 여름이면 시원한 대나무 자리로, 겨울이면 전기매트를 깔아 뜨뜻한 아랫목으로 변신했다. 수영복 대신 인견 소재로 된 런닝을 입고, 베개 하나만 가져오면 아빠가 만든 휴양지는 완성되었다. 달달한 팥빵과 뜨거운 맥심 커피를 곁들이며.
이제 그는 쌓아놓은 책을 신나게 읽기만 하면 되었다. 피곤해지면 썬베드 대신 장판에 누워 맛있는 잠을 청하고 말이다. 나는 거실을 지나다니며 책을 읽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곤 했다. 베개에 기대 누웠다가 턱을 받치고 엎드렸다가 아빠의 자세는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만화책을 보며 킥킥대는 남고생처럼 눈가에 미소가 번진 모습이었다. 내 눈엔 아빠가 자신만의 파라솔을 치고 해변가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자기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아빠를 보며 엄마는 나에게 속삭이곤 했다. 저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 나 같으면 진즉 책 한 권은 썼겠다고 말이다. 젊은 시절엔 엄마 대신 책만 들여다보니 내가 책이었으면 좋겠다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아빠의 취향에 맞춰 믹스커피를 내다 주는 엄마로서는 시라도 한 편 써주는 보상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엄마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책 속에 빠져들어 소소한 쾌락을 누렸다.
아빠의 독서는 마치 액션물과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듯 세계지리부터 문화, 역사, 소설책까지 인문학의 바다를 항해했다. 『상도』, 『혼불』, 『인간시장』, 『한강』, 『태백산맥』,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는 아빠가 읽는 책들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잘 몰랐지만 대학생이 되어 도서관에 꽂힌 그 책들을 보고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지금처럼 그림책과 만화책이 풍요롭지는 않았다. 내가 본 첫 만화책은 『먼 나라 이웃 나라』였다. 요즘 만화책에 비하면 컬러감도 없고, 스토리도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 내방 책장에는 위인전집과 세계명작전집이 있었다. 책장에 꽂힌 『소공녀』를 몇 번씩 읽었고, 『톰 아저씨의 오두막』를 읽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중학교 때는 수업 시간에 교과서 아래 김진명의 소설을 놓고 몰래 훔쳐보곤 했다.
아빠의 옆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책 읽는 일을 즐기는 어른으로 자랐다.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나 과학책을 즐겨 읽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는 친한 친구에게 팔짱을 끼듯 늘 책 한 권씩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곤 했다. 빈틈없이 글자가 빽빽한 『토지』를 혼자서 끝까지 읽어보려고 낑낑대기도 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을 읽고 우주로 날아갈 듯한 짜릿함을 느끼는 대학생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엄마가 되었고,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우리는 초점책을 보고 방긋방긋 웃는 갓난아기를 보고 신기해했다. 아빠는 유독 아이가 방긋 웃는 한 페이지를 찾아 보여주는 걸 좋아했다.
나는 아이와 아기자기 놀아주고 이유식을 맛있게 만드는 엄마는 아니였지만 무릎에 앉혀 책을 읽어주는 일은 즐겨 했다. 어린이 도서관에 가서 커다란 부직포 가방에 그림책을 잔뜩 담아올 때면 양손은 무겁지만 휘파람이 나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거실 마루에 마구 늘어놓고 나와 아이는 책과 뒹굴며 함께 노는 마음을 체득했다.
아빠가 LP판에서 MP3 플레이어로 그리고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게 된 세월 동안 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유튜브는 아빠와 나의 읽는 시간을 줄어들게 하긴 했지만 책만큼 깊은 내면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금요일 밤 맥주 한잔 하자는 친구의 전화가 울리지 않아도 우리는 책을 옆에 두고 있으면 외롭지 않았다.
국어 선생님이었던 아빠는 한 번도 나에게 국어성적에 도움 될 만한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 적이 없다. 언어영역 성적을 나무란 적도 없다. 아빠는 그저 파라솔을 물려주었다. 그럴듯한 서재도, 값비싼 물건도 아닌 자신만의 파라솔을.
우리 집 거실에 두 초등학생들이 만화책을 한껏 쌓아놓고 킥킥대고 있다. 뻥튀기와 요구르트를 옆에 두고. 그들은 꽤 오래된 파라솔을 꺼내와 펼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