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선생님이 착각했네. 미안.”
내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날짜나 일정 같은 것을 안내할 때 빼먹거나 실수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땐 바로 사과한다.
그 말은 큰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고민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잘못했으니까 잘못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런 사과 때문에 나를 만만하게 본 학생은 없었다.
오히려 관계가 더 편안해지고,
“선생님은 틀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권위가 아닌 신뢰의 기초가 되는 걸 느꼈다.
얼마 전, 또 한 명의 유명인이 논란에 휘말렸다.
과거의 행동이 다시 회자되고 기자들과 댓글이 쏟아졌다.
며칠간의 침묵 끝에 올라온 입장문은 사과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그 말은 오히려 더 큰 비난을 부르고 말았다.
“이제 와서 사과하면 뭐가 달라지냐.”
“처음에 침묵했던 게 다 계산이었지.”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사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공격의 소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학생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지만,
그는 대중 앞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더는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나는 사과로 수업을 이어가지만,
그는 사과로 관계에서 퇴장당한다.
어느 쪽이 더 큰 잘못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사과가 기능하는 장(field)이 다르다는 점,
그리고 그 차이가 단지 말의 완급이나 태도의 차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적 사회에서의 사과는 이제 위험하다.
사과는 반성을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단죄를 위한 증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과하는 순간 잘못은 확정되고
정당화의 기회는 사라지며
조금이라도 너그러웠던 사람들마저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사과할 이유가 없다.
그저 조용히 잊히는 편이 끝까지 버티는 편이 더 안전하다.
사과하지 않는 것이 전략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 되어버린 사회.
그래서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삼키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라거나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만 말한다.
하지만 나는 매 학기, 크고 작은 실수들 속에서
학생에게 사과하고
그 사과 이후에도 수업을 계속한다.
신기하게도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
관계를 되살리고,
학생과 나 사이의 거리를 조절해준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내게 아주 단단한 확신 하나를 남겼다.
사과는 관계를 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를 지키는 기술이 될 수 있다.
사과가 작동하기 위해선 사과할 수 있는 용기만 필요한 게 아니다.
그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관용이 함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과를 하지 않는 건
반성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사과해봤자 돌아오는 게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관용이 없는 사회에서 사과는
복구가 아니라 확정이고,
회복이 아니라 퇴장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람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려면 용서라는 감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용서는 잘못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 이후에도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장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시작이 불가능한 상태에 가깝다.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용서는 의심받고,
실수는 곧 낙인으로 굳어진다.
나는 교실에서 사과를 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학생들은 그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나는 여전히 교사로 남아 있다.
관계란 그런 것 아닐까.
사과를 할 수 있고,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이후에도 다시 함께할 수 있는 것.
우리는 지금
그 마지막 장면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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