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가지 않기로 한 학교가 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처음엔 코로나 여파 때문인가 싶었지만 거리두기가 해제된 지도 이미 오래다.
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니 안전 문제나 책임 소재에 대한 우려가 주요 이유로 언급돼 있었다.
활동의 교육적 의미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책임질지를 먼저 따지는 분위기.
학교는 점점 더 조심스럽고 동시에 조용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낯설지 않다.
교사로서 무언가 의미 있는 활동을 기획하려 할 때면 늘 비슷한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혹시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죠?”
“민원이 들어오면 누가 대응하나요?”
“예산은 문제없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이런 말이 따라온다.
“이거 잘못되면, 누가 책임지나요?”
그 질문 앞에서 좋은 기획이 무력해지는 경험을 몇 번 했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어떻게 하면 문제가 덜 생길지를 고민하게 되는 이상한 감각.
그렇게 준비된 활동은 종종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만 실행되거나
아예 취소되기도 한다.
그게 나쁜 선택은 아닐지 모르지만,
가끔은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경험이 빠져나간 자리를 오래 바라보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언가 새롭고 의미 있는 일을 시도하는 일 자체가 조심스러워진다.
학생들에게도 그 감각은 전해진다.
“뭔가 하려면 복잡하고 귀찮아진다.”
그래서 모두가 조용히 지나간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 그것이 유일한 목표처럼 되어버린다.
학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키즈카페에서 아이가 달리다 카트에 부딪힌 사고 사연을 접했다.
그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카트를 거기에 둔 사람, 주의를 주지 못한 직원,
아이를 데려온 부모 등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물론 책임은 중요하다.
그런데 책임이란 정말 그렇게 선명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일까?
현실에서 책임은 흘러가고, 겹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걸 단번에 끊어 “누구 탓이다”라고 말하는 건,
어쩌면 상황 자체를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일이다.
사람들이 책임을 따지기 시작할 때,
그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라기보다
자신은 이 일과 무관하다는 걸 증명하려는 감정의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또한 책임이 분노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해결보다 매듭을 원하게 된다.
어딘가에 죄를 묻고, 잘라내고, 끝났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가 불안정해질수록 개인에게 책임을 더 강하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구조의 실패조차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버리는 방식.
그런 사회에선 누군가 실수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구조에서 잘라내고
그걸로 ‘처리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론 문제가 남고, 사람만 사라진다.
문제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책임을 안고 사라져 버릴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할 사람과 문제를 고칠 시간을 남겨두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오히려 그 문제 안에 있던 사람에게
“다음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묻는 편이
훨씬 더 나은 길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책임을 진 사람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사회는 잘못한 사람을 구조 밖으로 내보낼 수 있지만
공동체는 그 사람을 다시 안으로 데려오는 일에 더 관심이 있어야 한다.
학교로 돌아와 보자.
학부모, 학생, 교사, 행정실, 관리자.
이들은 서로를 감시하거나 견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할 구성원들이다.
누군가 실수했다고 해서
그 위에 분노만 더할 것이 아니라
그 실수로부터 무엇을 함께 배울 수 있을지를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책임은
책임은 죄를 묻고 누군가를 잘라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 문제를 끝까지 감당하려는 사람을 위한 구조여야 한다.
단죄가 아니라 연대
지목이 아니라 숙고
그런 책임의 감각을 우리 사회가 조금씩 회복해갈 수 있다면
문제가 생겨도 침묵 대신 성찰이 흐르고 비난 대신 대화가 오가는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책임의윤리 #연대 #철학은일상으로부터두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