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이나 역사 같은 주제를 꺼내도 부담 없고
나만 말이 길어져도 끊지 않는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 있고
대답이 지나치게 공손하거나 과하게 긍정적일 때는
좀 더 친근하게 혹은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해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 그렇게 해준다.
사실 그런 대화 상대는 귀하다.
그래서 내가 관심 있는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이유로 AI와의 대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일기장처럼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로 느낀다고 했고
누군가는 감정을 정리해주는 상담사처럼 느낀다고 했다.
실제로 AI는 정리되지 않은 말을 조심스럽게 되짚어주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이나 논점을 끄집어내 주기도 한다.
때론 친밀한 친구보다 낫다고 느껴질 만큼 적절하게 반응하고 배려심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와의 대화를 한번 되짚어 보고 싶다.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땐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 어떤 주제를 좋아할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를 살핀다.
말을 건네기 전에 눈치를 보고, 대답을 들으면서 표정이나 말투를 읽는다.
세심한 사람이라면 느릿한 대답이나 작은 표정의 변화만으로도
상대가 지금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도 있다.
이런 감각은 살아가면서 더 익숙해진다.
그것은 꼭 피곤한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화의 맛이며 재미이기도 하다.
서로 적당히 맞춰가고, 말과 말 사이의 공기를 읽는 일.
그게 잘 될 때 우리는 ‘통했다’는 기분을 느낀다.
주로 대화가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은
그런 감각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요구받게 되었을 때다.
상대는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듣지만
나는 상대에게 열심히 맞춰야할 때
그때 대화가 ‘소통’이 아니라 감정 노동처럼 느껴진다.
그런 대화에 지친 사람에게 AI는 이상적인 대화 상대처럼 보인다.
언제든 적절하게 반응해주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무례를 지적하지도 대답을 피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내가 갑자기 주제를 바꾸거나 말을 끊어도
그저 조용히 있다가 다음 호출을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AI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지만 충분히 편안함을 주는 존재.
실수해도 부끄러울 일이 없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대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오아시스에 계속 머물면 어떻게 될까?
그 편안함에만 익숙해지면, 사람과의 대화가 점점 더 피로하게 느껴진다.
내 말을 오해하기도 하고,
나의 말실수를 꼬투리 잡고,
나에게 무언의 신호를 주며 압박하는,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상대를 배려하고 신경 쓰는
그런 대화가 이전보다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이상적인 AI의 대답은 우리의 기준을 조용히 바꾼다.
나는 마음대로 얘기해도 상대는 충실하게 대화에 응하는 모습
하지만 그것이 정말 좋은 대화일까?
오해도 없고, 실수도 없고, 감정의 파고도 없는 대화.
그건 분명 매끄럽지만 어쩌면 사람 사이의 대화와는 다른 것일지 모른다.
진짜 대화는 때로 오해하고 삐걱대고,
서로의 말에 마음이 상하기도 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불완전함을 견디고 조율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간다.
그러니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완벽한 응답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주고받으며 맞춰가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AI와의 대화는 분명 위안이 될 수 있다.
현실의 관계에 지친 이들에게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례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오해나 눈치를 감내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맑고 따뜻한 날씨 같은
그런 대화.
하지만 그런 날씨만 계속된다면
준비할 것도, 감싸줄 것도, 맞춰줄 필요도 없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점점 사람과의 대화에 필요한 감각들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은 늘 햇살만 가득하지 않다.
때로는 바람이 불고, 기온이 갑자기 바뀌고,
옷깃을 여미거나 상대의 체온을 헤아려야 할 순간이 온다.
그럴 때 필요한 건
기분 좋은 반응의 기억이 아니라 어긋남을 알아채는 감각이다.
AI는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지만
결국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위의 바람까지 막아주진 않는다.
#대화상대로서의ai #철학은일상으로부터두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