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선의 법칙
해마다 김장을 한다. 김장을 주도하는 주인공은 어머니다. 지난해 나는 집집마다(부모님네, 형네, 우리) 푼푼이 돈을 모아서, 이른바 ‘김장적금’을 만들어서 김치를 사먹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어머니가 반대했다.
“내가 아직 할 수 있어.”
어머니의 말투와 눈빛이 왠지 애틋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가족에게 맛있는 김치를 먹이고 싶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엿보였다. 나는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뜻을 굽혀야 했다.
김장하는 날엔 아들, 손주, 며느리가 총동원된다. 칠순 노모가 혼자 김장을 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아버지까지 나서서 무라도 씻으며 일손을 돕는다. 늙은 아내가 고생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내 짐작이 맞다면 아버지는 ‘사랑꾼 표창장’을 받아야 된다.
사실 김장에 발벗고 참여한다고 해도 남자들의 역할은 미미하다. 강판에 무를 갈거나, 절인 배추를 물에 씻는 일 정도? 사실상 어머니와 며느리들을 살짝 거들 뿐이다. 아무튼 나를 포함한 남자들은 우리가 김장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나는 보통 강판에 무 가는 일을 담당한다. 지난해 처음으로 김칫소 바르기에 도전했다. 참가자는 어머니, 나, 형수, 아내. 네 사람은 큰 스텐 다라이 두 개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힘을 모았다.
나는 처음 하는 일이라 더 정성을 기울였다. 잡념을 지우고, 딴청도 안 부리고 배춧잎 사이사이에 김칫소를 발랐다. 그런데 어머니에게서 뜻밖의 공격이 날아왔다.
“더 듬뿍듬뿍 발라야겠다.”
딴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어머니 성에는 안 찬 모양이다.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일까? 불쑥 장난기가 발동했다.
“괜찮아요. 내가 바른 건 내가 먹을게.”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가 돌변했다.
“도대체 넌 엄마가 말하면, 그냥 ‘예’ 하지를 않냐? 언제까지 그럴래?”
분위기가 싸해졌다. 진짜로, 조금, 억울했다. 물론 어머니 말은 약 육십 퍼센트는 맞다. 어릴 때부터 나는 고분고분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대체로 부모님 말에 토 달고 내 주장을 펼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오순도순 김장 담그는 상황에서 나의 ‘반항’을 꾸짖을 것까지야!
나는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묵묵히 김칫소를 처발랐다. 말그대로 처발랐다. 듬뿍듬뿍.
얼마 전, 그때 김장하던 시간을 회상하며 ‘도화선의 법칙’이란 말을 생각해냈다.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이 오래 묵은 분노를 폭발시키는 현상! 그 법칙에 따라, 김장할 때 던진 나의 농담은 쌓였던 어머니의 화에 불을 붙였다.
‘말 안 듣는 아들’은 나의 트레이드마크다. 어머니 말이라면 끔뻑 죽는 형과 달리 나는 파릇하게 살아 오른다. 물론 번번이 그러는 건 아니다. 나도 어머니 말에 군말 없이 따를 때가 분명 있다. 그 횟수가 어머니 눈높이에 못 미칠 따름이다. 어머니는 열 번 말하면 열 번 다 순종하길 바란다. 내가 어머니 말을 거스르는 건 네 번 정도다. 느낌상 그쯤 된다는 뜻이다.
어머니의 느낌과 내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인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여섯 번’은 순순히 따른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다. 여자한테는 열 번 잘해도 한 번 못하면 그 열 번이 다 물거품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혹시 어머니도 그런 걸까?
솔직히 그날 약간 놀라기는 했다. 그저 웃자고 한 말인데, 어머니가 화르르 타오를 줄은 정말 몰랐다. 늦은 밤 혼자 조용히 명상하다가 어머니 심정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이사 문제로 속이 적잖이 상해 있었다. 내가 일으킨 작은 불씨로 쉽게 터질 수 있는 상태였다.
아들 가족이 좋은 환경에서 살기를 바란 어머니는 돈을 얼마간 보태줄 테니 이사를 하라고 권했었다. 나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매몰찬 나의 반응에 일그러지던 어머니의 표정이 여전히 생생하다. 내가 단호하게 나간 까닭은 물렁하게 굴면 어머니가 강하게 밀어붙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도움 받을 면목도 없었고, 여러 모로 이사를 단행할 처지도 아니었다. 엄두가 안 나는 일로 오래 실랑이 벌이기 싫었다.
올해도 어머니는 어김없이 김장을 할 게 틀림없다. 이번 김장 때 나는 각별히 조심할 계획이다. 쥐 죽은 듯 조용히 일손을 거들 예정이다. 김장적금 이야기도 안 꺼낼 거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있다. 김칫소 바르기를 또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시키면 하고, 안 시키면 하지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