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만 처먹은 아들의 엉터리 심리학 5

도화선의 법칙

by 작은별송이

해마다 김장을 한다. 김장을 주도하는 주인공은 어머니다. 지난해 나는 집집마다(부모님네, 형네, 우리) 푼푼이 돈을 모아서, 이른바 ‘김장적금’을 만들어서 김치를 사먹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어머니가 반대했다.


“내가 아직 할 수 있어.”


어머니의 말투와 눈빛이 왠지 애틋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가족에게 맛있는 김치를 먹이고 싶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엿보였다. 나는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뜻을 굽혀야 했다.

김장하는 날엔 아들, 손주, 며느리가 총동원된다. 칠순 노모가 혼자 김장을 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아버지까지 나서서 무라도 씻으며 일손을 돕는다. 늙은 아내가 고생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내 짐작이 맞다면 아버지는 ‘사랑꾼 표창장’을 받아야 된다.


사실 김장에 발벗고 참여한다고 해도 남자들의 역할은 미미하다. 강판에 무를 갈거나, 절인 배추를 물에 씻는 일 정도? 사실상 어머니와 며느리들을 살짝 거들 뿐이다. 아무튼 나를 포함한 남자들은 우리가 김장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나는 보통 강판에 무 가는 일을 담당한다. 지난해 처음으로 김칫소 바르기에 도전했다. 참가자는 어머니, 나, 형수, 아내. 네 사람은 큰 스텐 다라이 두 개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힘을 모았다.

나는 처음 하는 일이라 더 정성을 기울였다. 잡념을 지우고, 딴청도 안 부리고 배춧잎 사이사이에 김칫소를 발랐다. 그런데 어머니에게서 뜻밖의 공격이 날아왔다.


“더 듬뿍듬뿍 발라야겠다.”


딴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어머니 성에는 안 찬 모양이다.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일까? 불쑥 장난기가 발동했다.


“괜찮아요. 내가 바른 건 내가 먹을게.”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가 돌변했다.


“도대체 넌 엄마가 말하면, 그냥 ‘예’ 하지를 않냐? 언제까지 그럴래?”


분위기가 싸해졌다. 진짜로, 조금, 억울했다. 물론 어머니 말은 약 육십 퍼센트는 맞다. 어릴 때부터 나는 고분고분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대체로 부모님 말에 토 달고 내 주장을 펼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오순도순 김장 담그는 상황에서 나의 ‘반항’을 꾸짖을 것까지야!

나는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묵묵히 김칫소를 처발랐다. 말그대로 처발랐다. 듬뿍듬뿍.


얼마 전, 그때 김장하던 시간을 회상하며 ‘도화선의 법칙’이란 말을 생각해냈다.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이 오래 묵은 분노를 폭발시키는 현상! 그 법칙에 따라, 김장할 때 던진 나의 농담은 쌓였던 어머니의 화에 불을 붙였다.


‘말 안 듣는 아들’은 나의 트레이드마크다. 어머니 말이라면 끔뻑 죽는 형과 달리 나는 파릇하게 살아 오른다. 물론 번번이 그러는 건 아니다. 나도 어머니 말에 군말 없이 따를 때가 분명 있다. 그 횟수가 어머니 눈높이에 못 미칠 따름이다. 어머니는 열 번 말하면 열 번 다 순종하길 바란다. 내가 어머니 말을 거스르는 건 네 번 정도다. 느낌상 그쯤 된다는 뜻이다.


어머니의 느낌과 내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인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여섯 번’은 순순히 따른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다. 여자한테는 열 번 잘해도 한 번 못하면 그 열 번이 다 물거품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혹시 어머니도 그런 걸까?


솔직히 그날 약간 놀라기는 했다. 그저 웃자고 한 말인데, 어머니가 화르르 타오를 줄은 정말 몰랐다. 늦은 밤 혼자 조용히 명상하다가 어머니 심정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이사 문제로 속이 적잖이 상해 있었다. 내가 일으킨 작은 불씨로 쉽게 터질 수 있는 상태였다.


아들 가족이 좋은 환경에서 살기를 바란 어머니는 돈을 얼마간 보태줄 테니 이사를 하라고 권했었다. 나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매몰찬 나의 반응에 일그러지던 어머니의 표정이 여전히 생생하다. 내가 단호하게 나간 까닭은 물렁하게 굴면 어머니가 강하게 밀어붙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도움 받을 면목도 없었고, 여러 모로 이사를 단행할 처지도 아니었다. 엄두가 안 나는 일로 오래 실랑이 벌이기 싫었다.


올해도 어머니는 어김없이 김장을 할 게 틀림없다. 이번 김장 때 나는 각별히 조심할 계획이다. 쥐 죽은 듯 조용히 일손을 거들 예정이다. 김장적금 이야기도 안 꺼낼 거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있다. 김칫소 바르기를 또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시키면 하고, 안 시키면 하지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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